국가는 없었고 국민만 있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성 칼럼] 권력과 언론의 유착에 맞선 시민의 연대


세월호 참사 12일째다. 백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직도 차디찬 물속에 남겨져 있다. 대한민국이 많이 아프다. 단순한 질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거의 치유 불가능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는 12일째 실종상태다. 오락가락,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면서 11일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에는 피멍자국만 깊어간다. 이번 사태에 대한 많은 치유의 글들과 정부 비판적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120만 명이 넘어선 국민들의 애도 물결이 함께 하고 있다. 지난 12일간 국가는 없었고, 국민만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맨 얼굴이다.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호를 보면서 그동안 국가에게 속아 살았다는 기분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세월호의 모습이 지금의 대한민국과 너무 닮아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혼자 도망가는 선장의 모습에서 대통령을 보았고, 선원들의 모습에서 국무위원을 포함한 우리나라 파워엘리트들, 즉 정치엘리트들과 시장권력자들을 보았으며,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선실에 대기했던 선한 아이들의 모습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치유가 불가능한 국가라는 결론에 이르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신동엽 시인의 “4월은 갈아엎는 달”처럼 국가를 갈아엎고 싶은 심정은 아닐까.

12일간 긴 침묵이 흘렀다. 기이할 만큼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마침내 오늘 오전 10시에 정홍원 총리가 긴급회견을 자청했다. “사고예방부터 초동 대응, 수습 과정에서 일어난 많은 문제에 대해 국무총리로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는 예의 상투적 표현으로 지난 12일간의 국가실종을 대신했다. 오랜 침묵이 무색했던 회견내용이었다. 새로운 희망을 기대했던 유가족 및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준 퍼포먼스였다.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경향신문> 2014년 4월 28일자 3면
<경향신문> 2014년 4월 28일자 3면

필자의 마음에 깊은 매듭이 맺힌 탓일까. ‘정부도 이만큼 했으니 할 만큼 했다’는 태도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사태 수습은 없고 민심 수습으로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 탓보다는 남 탓을 할 준비를 마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더 든다. 정부가 남 탓을 제대로 하려면 ‘공공의 적’을 만들 수밖에 없다. 가장 훌륭한 재료는 당연히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선장 및 선원, 사이비 교주와 그 일당 그리고 정부의 재난대응시스템 관련 공무원 등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저들이 좀더 화려한 밥상을 준비하려면 언급한 재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이것은 선험적인 앎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경험적인 앎이다. 국가가 가장 선호하는 재료는 ‘안보와 성장’임을 누구나 경험적으로 다 알고 있다. 저토록 분노하고 슬퍼하는 국민들에게 안보와 성장의 논리만 들이대면 만사형통임을 저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난 수 십 년간 두 재료, 즉 ‘협박과 당근’을 가지고 국민들을 길들여오지 않았던가. 따라서 누군가를 가리켜 복종적이고, 순종적이며, 의존적이고, 냉소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저 협박과 당근의 이념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하이에나들이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재료를 잘 다듬어 화려한 밥상을 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사회의 대표적인 하이에나는 누구인가. 누가 지난 11일간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며 권력의 시녀 노릇을 충성스럽게 수행해 왔는지를 보라. 그것이 언론과 방송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지나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언론과 방송이 앞장 서 오보의 나팔수를 자청하는 동안 권력은 어두운 침묵 속에서 새로운 공격 루트를 마련했을 것이다. 권력과 언론이 유착한 합작품이 곧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아마도 국민들을 상대로 융단폭격이 시작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물어야 한다. 저들의 융단폭격에 맞설 힘을 비축해 두었는지, 국민의 슬픔과 분노가 안보와 성장을 저해하거나 방해한다는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지, 주홍글씨와도 같은 종북 프레임을 극복해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각자의 의견과 입장 표현을 음모론이나 유언비어 유포로 몰아세우는 여론전을 이겨낼 수 있는지. 한마디로 우리는 권력과 언론이 주도하는 이런 담론구조에 맞설 대안담론을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공식적으로 법 앞에서 평등하고, 투표함 앞에서 평등하며, 계약당사자로서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불평등이 지속되는 것일까? 해답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각자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 사적이고 경제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시민들이다. 대부분 사적 활동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과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민주적인 정치활동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고 각자의 평등은 불평등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관심에 따라 행동하면 권력은 개입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관심과 반대로 행동하면 바로 그때 권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우리는 시민이 아니라 타자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이다.

시민들에게 권력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은 야만적인 지배와 노골적인 강제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독재의 위협적 경향은 폭압, 지배, 강제적 순응보다는 부드러운 가시적 복종에서 생긴 것이다. 지금 우리 안의 권력의 실체이기도 하다. 독재와 무질서의 위협은 고삐 풀린 무도한 자들이 아니라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시민들 때문에 발생한다. 고립되고 무력한 시민들은 연대를 통해 쟁취할 수 있는 권력을 사전에 분명히 알지 못한다. 시민들은 그러한 권력을 목도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해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긴급한 과제는 국민들의 행동을 형성하는 방법, 즉 정치활동이다. 먼저 우리는 시민들이 모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결집하고 통일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을 뜻한다. 2008년 촛불문화제와 같은 연대의 과학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시민들 스스로 그러한 행동을 욕망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시민들은 각자의 사적인 이익과 운명을 국가의 이익과 운명과 자발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정치활동은 사생활과 대립하는 공적 생활이었다면 오늘날의 정치활동은 사회의 생존과 삶의 문제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이 진정 민주국가라면 개인이 시민으로서 공동으로 행동할 때, 즉 연대할 때에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0]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