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내수 침체, 실적 부진, 구조 조정, 정리 해고, 취업난…. ‘씁쓸한’ 말들이 귀에 못이 박혔다. 벽두에 잠시나마 부풀었던 ‘밀레니엄’ 10여 년 만에 시대의 상징은 우울하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도 아니고 환란 이후 길게 이어지는 ‘위기’ 타령의 끝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호황이라는 말들이 이국어처럼 낯설다.
이런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재벌 기업들이 곳간에 쌓아놓은 현금은 125조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현재 매출 기준 국내 10대 재벌이 보유한 현금(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 포함)은 125조4천100억원으로 작년 말의 108조9천900억원보다 15.1%(16조4천200억원)나 늘었다.
현금으로 쌓아올린 재벌들의 성채
기업별로 보면,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액이 작년 말 54조5천억원에서 올해 9월 말 66조9천500억원으로 10대 재벌 중 가장 많이 늘어났다. 무려 22%, 금액으로는 12조4천600억원이 불었다. 올해 삼성전자는 영업이익이 급감하는 등 실적이 대폭 악화했는데도 그렇다. 같은 기간 현대자동차는 3조3천100억원(15.2%), SK하이닉스 3조7천억원, 현대모비스 3조3천900억원의 현금 보유액을 늘렸다. 천문학적인 숫자에 감도 잡히지 않는다.
또한 지난해 국내 상장사 임원 중 가장 많은 소득(근로+배당소득)을 올린 10명을 뽑아본 결과, 모두 삼성·현대차·에스케이(SK)·엘지(LG) 등 주요 그룹 총수 일가로 나타났다. 국세청의 2012년 자료를 살펴보면, 전체 배당소득을 올린 투자자 중 상위 1%가 전체 배당소득의 72.1%를 차지했다. 상위 1%의 1인당 평균 배당소득(9260만원)은 중위(상위 50%) 배당소득(2만원)에 견줘 4,630배에 이른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보유 주식 평가액 기준 상위 1%는 시가총액 60%의 주식을 갖고 있고, 하위 60%는 시가총액의 단 2%만 차지하고 있다. 한 해 평균 500만명에 이르는 개인투자자들은 아무 힘도 못 쓰는 ‘개미들’이고, 주식 자산 대부분은 재벌 총수 일가와 같은 소수의 투자자들이 갖고 있다는 뜻이다.
장기 불황 속에서 부의 양극화는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불황을 이유로 재벌들에게 엄청난 세금 감면 혜택을 주었지만, 실상은 많이 다르다. 살기 팍팍한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재벌을 배불린 꼴이지만, 불행히도 이를 제대로 짚고 비판해야 할 주류 언론은 철저히 자본의 편이다.
양극화를 극단화한 ‘비정규직법’의 위선
우리 사회를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부익부 빈익빈의 끝판으로 몰아가는 바탕 한편에 비정규직 보호법이 있다. 2006년 11월 30일 국회에서 통과해 2007년 7월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 적용한 이 법률은 2008년 7월 100인 이상 사업장, 2009년 7월 1일에는 5인 이상 사업장으로 시행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건비 절감, 용이한 인력조정 등의 이유로 급속히 확산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남용을 막고 그들의 불안정한 고용 상황을 해소한다는 취지로 발효했다. 이 법의 내용은 크게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금지 △기간제 근로자의 총 사용기간 2년 제한 △파견근로의 범위·기간과 관련된 보호 등을 담고 있다.
이 법률에 담긴 현실은 우리 사회의 위선을 그대로 폭로한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이 법의 시행을 앞두고 당시 기업들은 2년 이상 된 노동자들의 정규직 고용을 피하기 위해 법 시행 전 대량 해고를 단행했다. 이 법은 오히려 기업들이 다양한 편법으로 악용됐고 비정규직 보호라는 실효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나라에서 공식 집계되는 비정규직은 2002년 임금노동자자 중 27.4%였다가 2013년 32.6%로 늘었다. 노동자 수로는 2002년 383만9천 명에서 2013년 594만6천 명으로 늘었다. 이것은 정부 공식 통계일 뿐 실제로는 이의 2배 정도라고 보는 자료도 있다.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삶이 반토막 났고 거리로 나앉거나 해체됐다.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임금을 100으로 할 때 202년 67.1에서 2013년 56.1로 떨어져 정규직과의 격차가 더 커졌다(표 1 참조). 비정규직의 상대임금은 신용카드사태가 있었던 2003년 61.3으로 떨어졌고, 내수침체가 있었던 2008년 60.9로 하락한 후 국제금융위기가 있었던 2009년 또 다시 54.6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아 경기변동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010년 이후에는 정규직과의 상대임금 격차가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났으나, 2013년 다시 격차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최은영, 「비정규직 고착화에 대한 비판적 검토」, 생활과학연구논총 제18권 제1호, 2014)
<표 1> 근로형태별 월평균 상대임금 추이(정규직=10)
더구나 한번 이런 비정규직 상태에 빠지면 그 굴레는 개미지옥과 같다. 저임금이나 빈곤상태에 진입했을 때 그 상태로부터 탈출이 매우 어렵다는 연구결과들(강신욱, 2011; 윤윤규·성재민, 2011)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6년까지 9년 동안 빈곤 진입에 따른 소득분위 하락폭은 매우 높은데 비해 빈곤탈출에 따른 소득분위 상승폭은 크지 않아, 일단 빈곤에 진입하면 소득지위 악화로 이어진다는 것이 확인됐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적 차별의 데자뷰
‘기괴한 데자뷰’를 본다. 일제 강점기의 노동 상황이 지금과 일란성 쌍둥이 같다. 당시 한국 내의 한국인 노동자들과 한국내 일본인 노동자들의 임금 차이가 지금의 정규직과 비정규칙의 격차를 빼닮았다. 같은 일을 하고도, 아니 더 험한 일을 하고도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인간 이하의 차별 대우를 받았다.
1929년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의 공장의 경우, 일본인 성인 남자 임금이 1일 1원 32전일 때 한국인 성년 남자는 1원, 한국인 성년 여자는 59전이었다. 임금지수로 보면, 한국인 성인 남성의 경우 1920년을 100으로 할 때에 1925년은 85, 1927년과 1929년에 각각 83, 1933년부터 1935년까지 55였다. 노동 문제 전반을 치안유지법,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등과 같은 사회질서 유지 차원의 공안 관련법들로 탄압하는 것도 지금과 판박이다.
나라를 빼앗긴 강점기 때 노동자의 임금은 같은 일을 하고도 일본인의 반값이었고, 만개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비정규직의 임금은 같은 일을 하고도 정규직의 절반이다. 일자리의 절반 정도가 ‘반값’인 비정규직이 됐고, 불황을 이유로 대규모 구조 조정을 일삼은 재벌들은 여전히 수 조, 수십 조의 순익을 쌓고 있다. 경영 위기라며 수많은 노동자들을 목 자른 최고 경영자에게는 수십억 원의 실정 배당이 주어졌다. 사악한 자본의 본질은 유구하다. 이 말 말고는 이 기막힌 데자뷰, 언어도단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강요당했다가 내면화한 '차별의 지배 방식'
제국주의 역사에서 피식민지 인민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일상적이었다. 문제는 해방된 식민지에서 그러한 식민지적 억압과 차별을 청산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국민에 대한 자국민의 억압과 차별을 내면화했다는 것이다. 친일파가 여전히 강고히 득세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자본이 일제가 강요한 자기모멸을 내면화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인간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과 차별이 제도 도입 7~8년 만에 공공연한 사회적 일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비정규직 제도는 신자유주의가 불가피하게 몰고 온 새로운 상황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자본과 지배집단들이 채택한 차별의 지배방식이었다. 비정규직은 이제 우리 사회의 임시항이 아니라 상수항이 됐다. 비정규직은 우리 사회 내부에 우리 스스로 만든 식민지다. 그 식민지를 수탈해 남긴 이윤으로 자본은 터질 듯이 배부르고, 비정규직들은 끊임없이 배고파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분명한 사실은 내수는 극소수 부자들의 금고가 아니라, 절대 다수 보통 시민들의 주머니로부터 살아난다는 것이다. 절반에 가까운 노동자들의 호주머니가 반값으로 깎이고,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채 ‘반값만 받고 하는 일’이라도 감지덕지하는 인욕(忍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내수는커녕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엄조차 살아날 리 없다.
불황의 터널 '마술 호리병'에서 빠져나오는 길
터질 듯 쌓아 놓은 재벌들의 곳간은 노동의 정당한 대가로서 마땅히 비정규직을 비롯한 노동자들에게 풀어야 한다. 그래야 시중에 돈이 돈다. 그래야 내수가 살고 경제가 산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재벌이 사는 길이다. 재벌들이 탐욕스레 독과점해 움켜쥔 돈 주먹을 펴지 않는 한 장기 불황의 터널, 마술의 호리병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다. 우리 안의 이 식민지를 해방시키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한 걸음도, 단 한 걸음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김윤곤 칼럼 3]
김윤곤 / 시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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