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꾼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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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정치ㆍ언론과 민주주의적 특권


박근혜 정권의 인사 참사가 반복되고 있다. 이완구 총리 후보자, 겉모습만 보면 충청도 양반처럼 점잖게 생겼다. 그런데 요즘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입술을 앙다문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점잖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사진으로만 봐도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구분이 된다. 연일 그의 검은 속살이 드러나고 있다. 차남과 본인의 병역 기피 의혹, 분당 토지 투기 의혹, 타워팰리스 투기 의혹, 국보위에서의 활동과 삼청교육대 역할 의혹, 황제특강 의혹, 경기대 교수 특혜 채용 의혹, 차남의 건보료 무임승차도 모자라 그의 삐뚤어진 언론관까지 확인됐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이 되려면 최소한 저 정도의 의혹들을 속살로 가진 철면피가 되어야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다 알고 있다. 그러니 시민들이 정치인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질 수가 없다. 사실 정치인들은 대부분 임시변통이나 기회주의에 능한 자들이다. 그들은 천부적인 중고차 판매인과 같아서 정치만큼은 신제품을 좋아하며, 정치 무대에서 사리사욕을 좇아 이전투구를 벌인다. 누가 되어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냉소와 불평이 쏟아지는 근원지다.

<한겨레> 2015년 2월 9일자 1면
<한겨레> 2015년 2월 9일자 1면

이완구 총리 후보자의 경우,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도 문제지만 정작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언론관이다.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는 언론의 자유와 투표다. 그런데 이 후보자의 언론에 대한 태도는 언론사 통폐합 등 언론 자유를 말살한 독재정권의 ‘보도지침’, ‘언론 공작’을 연상케 할 정도로 위협적이고 위험하며, 그를 투표로 선택한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언론은 정부와 야당의 갈등, 마찰, 잘못을 날카롭게 감시하는 일이다. 그럴 때만 언론의 민주주의적 활동이 정당화된다. 가끔 정도를 지나쳐서 침소봉대가 될 때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모자람보다는 지나침이 낫다. 언젠가부터 한국 언론은 ‘기레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언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기자들을 조롱하는 말이다. 언론이 경계하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그들의 전매특허인 은폐, 속임수, 합리화를 이용하여 언제든지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이 총리 후보의 막말도 여기서 출발한다. 아마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바보라고 여길 지도 모른다.

<동아일보> 2015년 2월 7일자 6면(종합)
<동아일보> 2015년 2월 7일자 6면(종합)

언론 매체의 소비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말아야 한다. 언론이 ‘기레기’로 전락한 데는 소비자들의 책임도 있다. 감시의 눈초리가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매체가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또한 정치적 쟁점에 대해 자신이 읽고 들은 내용을 평가할 때는 수많은 이해가 충돌하고 정당한 요구들이 동시에 충족될 수 없는 복잡한 사회를 운영하는 어려움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불평만 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냉소와 불평도 사실은 여기에 해당한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불신만 사고 있다고 불평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온당치 못한 태도다. 이 총리 후보자가 그의 언론관에 대한 매체의 비판에 ‘대오각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책임지는 태도이기 보다는 또 다른 은폐요, 속임수며,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 거대한 조직을 어떻게 조종하고 작동시킬 것이며,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정치가란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일하는 정치꾼이며, 정치꾼은 자신을 위해 나라, 집단, 계급을 이용하는 정치가라는 조르주 퐁피두의 말을 기억한다면 이 총리 후보가 정치가인지 정치꾼인지 단박에 알아 챌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는 최악은 투표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잘못된 유추에 사로잡혀 있다. 가령 “아주 보기 싫은 두 꼬마가 나한테 매달리는데, 왜 내가 둘 중 하나를 받아줘야 하는 거지?”라는 판단 말이다. 투표에 불참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두 꼬마 중 더 보기 싫은 꼬마에게 투표하는 셈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선거란 마치 평상시보다 상품 공급이 부족한 상태와 같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민주주의적 특권을 잊어버린 이유는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특권이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쟁취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투표의 자유가 핏빛 어린 투쟁의 역사를 통해 얻은 권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 점을 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민주적 의무에 대해 그렇게 오만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것이다.

냉소주의자와 게으름뱅이는 자신의 한 표가 무슨 변화를 가져오겠느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원칙적으로도 그렇다. 현실적으로 보면 소수의 표도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원칙적으로 보면 투표를 거부하는 태도는 스스로 참정권을 박탈당한 격이며, 시민이 역사적 성과에 등을 돌림으로써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 격이다.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고자 한다면 자신의 민주주의적 특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언론이 제대로 서고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할 때 정치꾼이 아니라 정치가가 나오는 것이며, 그들이 정치를 할 때 비로소 좌초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호도 순항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정치꾼의 몰락을 지켜보며 언론의 자유와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5]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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