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의 마지막 '대구시당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황순규(35) 전 동구의원은 매일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두꺼운 옷을 챙겨 집을 나선다. 동대구IC 인근에 있는 택배회사로 출근해 전국 곳곳에서 온 포장된 물건을 내려 자신이 타고 다닐 2.5톤 트럭에 옮겨 싣는다. 아침 6시부터 이렇게 옮겨 실은 뒤 8시쯤 주요 배달지역인 북구 일대 대형마트를 비롯한 크고 작은 매장과 사무실 등에 '택배' 일을 한다. 보통 오후 3-4시쯤 일이 끝나지만 연말연초에는 물량이 많아 늦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한달 일하고 받는 돈은 150만원.
"똑같이 하루 8시간을 일해도 새벽에 일 나가는게 처음에는 영 힘들데요. 덕분에 4년간 찐 살이 2~3달만에 다 빠졌지만요. 한동안은 쉬기에 바빠 저녁에 사람들도 잘 만나지 못했는데, 몇 달 일하고 나니 좀 익숙해져 요즘은 저녁에 한 잔씩 합니다".
구의원에서 택배기사로..."지방자치 도전하겠다"
대학생 때부터 진보정당 활동을 한 그는 "새벽에 일나가 다녀보니 말로만 하던 '서민' 생활을 더 실감하게 됐다"면서 "요즘 내 모습이 마치 평화뉴스에 연재됐던 '길 위에 서민'이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웃었다. 황 전 의원은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런 서민의 마음으로 다시 지방자치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정당은 해산됐지만 진보정치와 지방자치는 여전히 필요하고 그게 내 소임인 것 같다"며 "더 노력해 진짜 서민과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다"고 의지를 보였다.
당직 선거 전 '정당 해산', 대구의 '통진당' 당직자들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해 '정당 해산' 결정을 했다. '정치적 탄압'이나 '민주주의ㆍ정당정치 훼손' 같은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헌법재판소의 이 결정으로 통진당은 해산됐고 모든 정당 활동이 금지됐다. 당초 통진당은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당원 총투표를 통해 당직자를 새로 뽑을 예정이었으나 '정당 해산'으로 무산됐다.
당시 통진당 대구시당위원장은 황순규 전 동구의원이었고, 예정된 대구시당위원장 선거에는 이대동(44) 대구시당 사무처장이 단독 출마한 상태였다. 단독 출마로 당선이 유력하던 이대동 전 사무처장은 헌재 결정에 따라 남은 당무를 정리해야만 했다. 또 당시 대구시당 부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던 송영우(42) '지방자치위원장' 역시 모든 당무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송영우 전 지방자치위원장은 지난 6.4지방선거 때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해 낙선했다. 마지막 대구시당위원장과 사무처장, 그리고 대구시장 후보. 통진당 해산 이후 그들은 각자 '생계'를 걱정하면서도 '진보정치'의 꿈을 접지 않고 있었다. 최근 만나거나 전화로 이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통진당 만의 문제 아니다"...'다른 대구 포럼' 준비
가족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동구 율하동에 있는 '협동조합 달콤한 밥상'에서 비상근으로 활동하고 있다. 친환경 반찬과 먹거리 공동체를 지향하는 이 곳에서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만 상근하며 조금의 '활동비'정도 받는다고 한다. "이걸로는 생계가 안되니까 다른 알바도 찾아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과 마을 일을 하며 지낸다"는 그는 "정당이 해산됐지만 진보정치는 포기할 수 없다"면서 "공부도 하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고 했다.
정당활동을 할 수 없는 그는 '포럼' 형식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가칭 '다른 대구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사회와 진보정치에 대해 토론하고 공부하는 모임인데, 빠르면 3월쯤에는 창립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진당 해산은 통진당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진보정치와 민주주의의 문제"라며 "보수적인 대구사회에 꼭 필요한 진보정치를 위해 정당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했다. 그는 "2016년 총선을 생각하고 있다"며 출마의 뜻도 전했다.
통진당 해산..."전국 200명 실업자" 퇴직금은?
그는 "통진당이 해산되면서 본의 아니게 해고된 사람이 전국적으로 200명쯤 될 것"이라고 했다. 통진당 국회의원과 그 보좌관, 비례대표로 선출된 지방의원, 중앙당과 시.도당 당직자들 모두 '실업자'인 셈이다. 그는 "당직자들 모두 실업급여 대상"이라며 "한동안은 실업급여로 버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 당직자의 '퇴직금'은 논란이 있다. "정당해산은 회사의 청산이나 폐업에 해당하는데, 회사에 자산이 없으면 국고에서 퇴직금을 정산하지만 정당해산은 전례가 없어 퇴직금을 받을 수 있을 지 법적으로 논란이 될 것 같다"고 그는 설명했다.
"정당 해산, 민주주의ㆍ진보정치 살리는 계기로"
그는 해산 이후 옛 당원들 분위기에 대해 "전반적인 공안탄압 속에 위축된 당원들도 있고, 통진당 해산을 계기로 야권과 진보정치의 재편을 기대하는 당원들도 있다"고 전했다. 또 대구지역 시민사회에 대해서도 "정당 해산이 부당하다며 함께 대응하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통진당이 진보정치에 민폐를 끼쳤다는 얘기도 있다"며 "통진당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대구는 다른 지역과 달리 통진당 해산에 대한 인식이나 공유가 어려운 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 역시 새로운 시민정치모임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6.4지방선거 때 대구시원(북구3 선거구)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그는 "이제 통진당 이름으로는 할 수 없지만 진보정치에 대한 논의는 계속 해야 한다"며 "옛 당원들과 함께 포럼을 비롯한 다양한 형식의 모임을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당 해산이 부당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진보정치를 살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 희생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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