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것은 대체로 고통과 경악을 수반한다. 시민항쟁의 소용돌이에서 최루탄을 마시거나, 천재(天災)라고 볼 수 없는 인재(人災)에 의한 대형 사고를 맞아 직간접적인 피해자가 되었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경험했는데, 붉은 옷을 입고 광장에 모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고통을 불사하면서 촛불을 들고 모여야 했다. 그래도 역사의 현장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될 만한 상황이 다시 터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 저마다 인식을 다를 수 있겠지만, 이번 역사적 사건은 축제같이 다가왔다. 그것은 기습과 역습에 의한 것이었다. 2월 10일부터 시작된 제340회 국회 회기 중에 국회의장이 기습적으로 직권상정을 결정하였고, 야당은 이를 막기 위해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토론을 요구하여 회기가 반 이상 남은 상태인 지난 2월 23일부터 토론을 시작했다. 무제한 토론을 이용하여 상정된 법안에 대한 표결을 막으려고 회기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토론을 이어가는 필리버스터. 3월 10일까지 끌고 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우리나라 헌정사는 물론이고 전세계 의회에서도 전무후무한 장장 17일 간, 무려 389시간을 목적으로 하는 필리버스터가 전개되었다.
흔히 필리버스터는 정치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영웅성을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하곤 한다. 작년에 방영되었던 KBS의 드라마 어셈블리에서 ‘진상필’이 25시간 동안 의사진행 발언을 이어가는 장면이 그 예이다. 실제로 필리버스터를 수행한 정치인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현재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몰고 온 버니 샌더스 후보도 상원의원 시절에 부유층 감세 법안을 막기 위해 진행했던 8시간 37분에 걸친 필리버스터로 무명 정치인을 벗어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김대중 전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에 진행했던 5시간 19분 동안의 필리버스터는 전설로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을 막기 위해서 박한상 의원이 진행한 10시간 15분 동안의 필리버스터는 말할 것도 없다.
필리버스터, 그 시간 기록보다 더 중요한 발언의 내용
그렇게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던, 혹은 빛바랜 역사책에서나 찾을 수 있는, 아니면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던 그 필리버스터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긴 시간을 담보로 두고 말이다. 기록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전세계 의회 역사에서 최장기록으로 남아있던 캐나다 의회의 58시간은 훌쩍 넘어섰다. 전설이었던 예전의 시간 기록은 이제 염두에서 사라졌고, 단상에 올라오는 토론자마다 평균 5시간 이상의 연설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발언의 내용이다. 중언부언으로 끌어 나가거나 성경이나 전화번호부를 낭독하면서 시간을 소비하여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것이 필리버스터라는 생각을 날려버리고 있다. 다섯 시간이나 열 시간을 넘겨 말을 하면서도 의제에 집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주옥같은 언사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이런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법안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기도 하고, 이러한 법안이 끼치는 영향을 언급하면서 억압과 저항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를 꿰뚫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치에 입문한 계기를 설명하면서 우리 사회가 성취하여 할 이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토론을 위해서 단상에 오른 국회의원 당사자 역시 이러한 기회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발언자는 필리버스터를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벌어진 필리버스터가 반 세기가 지난 52년 전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이력과 신념을 역설하면서 발언을 이러가고 있다. 비록 본회의장이 텅 비어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여한없이 풀어낼 기회가 있었던가. 치유의 기본은 자신을 쏟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번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자신을 치유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국민 개개인을 치유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당은 물론이고, 필리버스터를 주장한 야당조차도 이번 필리버스터의 반향이 이렇게 클 줄 몰랐던 것 같다. 사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고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도 몰랐을 것이다. 과연 제대로 잘 치러낼 수 있을까 의심했을 것이고, 저러다 말겠지 하는 비관도 있었을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되는 첫날에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국회방송은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고, 국회 방청권은 동이 나고 있다. 토론에 나선 국회의원들의 발언은 실시간으로 회자되면서 어록과 유행어를 양산하고 있다. 급기야 텔레비전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을 패러디한 ‘마이 국회 텔레비전(마국텔)’이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역시 국회의원은 역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이 돌게 된 것은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성과 전문성에 대한 인정이다. 아마도 1988년의 5공청문회 이후에 이렇게 국회에 이목을 집중했던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필리버스터’라는 용어가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리버스터를 위하여 동원되는 조항은 무제한 토론의 실시 등에 관련한 것이다. 말하자면 많은 논의가 필요할 정도로 중요한 법안에 대해서 통상 15분으로 제한하는 토론 시간을 풀어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은 채 토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토론자의 순서가 1, 3, 5, 7, 9 등의 홀수로 되어 있는 것도 그 이유다. 반대 의견을 내놓으면 있으면 찬성 의견도 들어야 할 텐데, 2, 4, 6, 8 등의 찬성 토론자들이 신청을 안 하거나 신청했다가 포기하였으므로 비워두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무제한 토론이 결정되었을 때 여당 의원 6명이 신청했다가 철회했다고 한다. 유신 정권에 의하여 사라진 무제한 토론이 반 세기만에 부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 여당이 만들어낸 국회선진화법 덕분이다. 아마 이것이 없었다면 국회 본회의장은 점거와 농성, 그리고 폭력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또 다시 정치에 대한 환멸이 선동될 것이고, 정치인은 그놈이 그놈이라는 자조가 일어났을 것이다. 무제한 토론은 다수의 횡포에 맞서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장치이다. 의사진행 방해를 위한 필리버스터가 너무 빈번하게 진행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이 무제한 토론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설사 일정에 따라 의결하더라도 중요한 안건은 무제한 토론을 거쳐 표결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합리적 의심
흔히들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니다. 다수결은 민주주의를 일시적으로 유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자유와 평등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고, 그 이성에 의한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며, 그러한 자유를 가진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성별과 인종과 취향 등등에 의하여 차별받아서는 안 되듯이, 소수라고 해서 다수에 의해서 소외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진리의 문제나 시비의 문제는 다수결을 적용할 수 없다. 갈릴레오가 지구가 돈다고 주장했을 때, 당시의 다수결에 따르면 태양이 돌아야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수의 이익과 소수의 이익이 충돌할 때, 이익의 확장을 위하여 더 큰 이익을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때 적용하는 것이 다수결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유보한 채 공공성과 효율성을 취하여 결정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결은 공익과 선택의 문제에 한정해야지 전가의 보도 같은 만능의 장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관으로서 국회는 그야말로 토론의 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만족할 만한 토론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한두 사람의 인식이 아닐 것이다. 토론의 중요성과 과정을 논의할 때 예를 드는 작품으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1957)이라는 영화가 있다. 누가 보더라도 유죄라고 생각되는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에 대한 법정에 모인 12명의 배심원 중에서 합리적 의심을 가진 한 사람의 의견으로 시작하여 한 사람 두 사람 의견에 동조하다가 결국 모두의 만장일치로 무죄로 의견을 모은다는 이야기이다. 합리적 의심이 일어날 때, 그것을 철저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개개인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정치권에서,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번 필리버스터를 야기한 이른바 ‘테러방지법’이라고 이름 붙어진, 실제로는 ‘국민감시법’ 또는 ‘국정원강화법’이라고 일컬을 만한 법안에 합리적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을 국회 내의 다수가 밀어붙인다고 넘어가야 할 것인가. 만약 그래야 된다면 그야말로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광우병 사태를 비롯한 지난 몇 번의 예에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난 것이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려면 진정성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대의제의 장점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정치적 생명을 걸기도 해야 할 터인데, 이번에 벌어진 필리버스터는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사실 이번 필리버스터의 결과는 낙관적이지 않다. 의결을 지연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막을 수는 없다. 회기가 끝나면 안건이 소멸되는 다른 경우와 달리, 무제한 토론에 부쳐진 안건은 바로 다음 회기에서 지체 없이 표결하여야 한다는 단서 조항에 따라 다수결에 의하여 결정될 확률이 높다. 유일한 희망은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철회하는 것인데, 강퍅하기 이를 데 없다. 아니, 그 전에 이번 필리버스터의 위기는 이 글이 게재될 29일이다. 선거구 획정안을 의결하려면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총선을 연기해야 한다. 언론은 여야 양비론 혹은 야당책임론을 설파할 것이므로 그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필리버스터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 때는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제 야당이 이렇게 야당다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언제 정치인들이 자신의 알몸을 이렇게 처절히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언제 국민들이 국회에 이렇게 주목한 적이 있었던가. 언제 국회 방청성이 이렇게 꽉 찬 적이 있었으며, 국회방송이 이렇게 높은 시청률을 올린 적이 있었던가. 이번 필리버스터는 그야말로 또 한 번 역사의 현장을 만들어 주었다. 그 동안 의심스러웠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위기 의식를 날려버릴 만한 기회를 얻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대의민주주의의 축제가 된 것이다. 필리버스터 자체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더라도 이번 필리버스터는 아름답다. 필리버스터를 응원한다.
[권오현 칼럼 2]
권오현 /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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