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고령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단체의 나이가 곧 대표나 사무처장의 경력과 겹치는 곳이 많고, 세대교체를 이끌 ‘허리’는 보이지 않는다. 기존과 신규 활동가 사이의 경력·세대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선배 활동가들은 은퇴와 세대교체를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전망을 낙관하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나를 포함한 젊은 활동가들도 자리를 잇겠다는 확신이 약해 보인다. 나 역시 대구참여연대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의욕이 넘쳤는데, 경력이 쌓일수록 또 나이가 들수록, 이 삶을 버텨낼 자신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젊은 시민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재정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게 풀릴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여력이 늘면 유입엔 도움이 되겠지만, 머무를 이유가 되긴 어렵다. 높은 급여와 안정성만으로 퇴사를 막을 수 없듯, 현재 떠나는 이유도 사람과 시스템 문제가 크다.
감히 현 시민사회의 문제를 말하자면 역할과 책임이 불분명하고, 성과와 보람이 개인의 삶을 지탱하기엔 너무 느리고 불투명한 점이 아닐까 싶다. 활동은 노동이지만 노동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활동’과 ‘삶’의 경계는 점차 흐려진다. 감정노동과 관계 갈등이 더해지면 남는 것은 피로감, 사람에 대한 실망, 그리고 회의감과 무력감이 남는다. 의미를 좇다 지치고, 현실을 버티다 지쳐 사라져 간다.
결국 중요한 건 활동가가 이 삶을 진실로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는 재정을 들여 젊은 인력 확충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문제이며 효능감의 문제다.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고, 활동이 존중받는 시스템을 갖추며,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구조가 필요하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고 있다는 감각, 내 노력이 공동체에 닿고 있다는 감정, 그리고 내가 이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내부의 동기가 없다면 누구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결국 그 효능감은 개인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구조를 바꾸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시민사회는 이제 그 감각을 설계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헌신의 세계’에서 ‘함께 일하며 성장하는 세계’로의 전환이 없다면, 젊은 시민사회는 공허한 말로 남을 것이다. 서로의 경험이 존중되고, 배움이 순환하며, 새로움이 허용되는 환경 속에서 선배의 경험은 귀히 다뤄지고, 후배의 시도는 존중받아야 한다. 익숙한 방식을 넘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더라도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시민사회는 늙지 않는다.
오래된 관성만으로는 더 버티기 어렵다. 얼마 전 윤석열 퇴진 집회에 참여했던 분이 이렇게 말했다. “참여했던 젊은 세대들이 이후에도 무언가를 계속하고 싶은데,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의 시민사회 활동 방식은 조금 부담스럽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세대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을 맞아줄 ‘장’이 부족하고 지금의 방식은 ‘부담’이다.
‘새로운 장’은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체계적으로 일을 설계하고 기록하며 점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경험에 의존하거나 즉흥적 대응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획과 실행, 평가가 구분되고, 사람 중심이 아닌 구조 중심의 운영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민사회가 기업이나 회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직이 움직이는 방식은 어느 정도 벤치마킹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거와 달리 젊은 세대는 이미 다양한 조직 경험을 갖고 들어온다. 대학 생활이나 아르바이트나 때로는 직장 경험을 거쳐 들어올 수도 있다. 나도 다 해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때와 지금의 조직 문화는 많이 다르다. 시민사회가 여전히 과거의 방식에 머문다면 안 될 일이다. 효율성과 체계는 냉정함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이다. 구조가 사람을 지탱하게 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의 전환이다. 조직이 안에서 건강하게 작동하고 그 힘을 밖으로 전달할 언어가 필요하다. 나는 그 언어가 행정의 언어와 마케팅 언어라고 생각한다. 행정과 이야기할 때는 제도의 언어로 대화하고, 시민과 이야기할 때는 일상의 언어로 공감하며 설득해야 한다.
예산과 조례 그리고 행정법을 공부하면서 확실히 느꼈다. 행정의 문장 하나, 법률 용어 하나가 정책의 방향을 바꾸기도, 의도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젊은 시민사회는 이런 언어의 차이를 이해해야만 활동의 방향을 설계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령 이번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 처음에는 ‘고도의 통치행위’가 맞나 아니냐는 말로 시끄러웠다. 사실 논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고 상대할 일도 아니었다. 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가 맞다. 행정법 교과서를 열면 꽤 초반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만 그 고도의 통치행위일지라도 계엄이 내란일 경우에는 사법 심사에 대상이 될 뿐이다. 이를 둘러싼 여론과 말들은 종종 실제 현실보다 감정에 머물게 된다. 상식과 제도적 언어의 괴리라고 본다.
시민사회는 나이로 젊어지지 않는다. 익숙한 방식을 넘어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새로움을 시도할 때 비로소 젊어진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조용히 ‘젊은 시민사회’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더 젊은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더 젊은 감각과 태도가 자리 잡는 일이다. 세대의 교체가 아니라, 구조의 전환이 시민사회를 젊게 만든다.
[시민사회 칼럼 105] 조영태(대구참여연대 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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