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아버지 시대 답습 않기를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2.12.2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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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5 남영동>...국가 폭력과 민주주의, 평범한 이들의 희생과 기대


"나는 빨갱이다. 폭력혁명주의자다"


눈이 가려진 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끌려온 김종태(배우 박원상)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은 칠성판(1970-80년대 고문장비로 사용되던 얇은 나무 판)과 욕조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하며 이 같이 말한다. 본적도 없는 북한 관계자들과 월북한 형제들을 "만난 적 있다"고 거짓 증언하고 점점 피폐해져 가는 종태. 그러나, 거짓 진술을 할 때마다 군사정부 관료들은 "진급기회를 얻었다"며 기뻐했고, 종태에게 "이제 곧 나갈 것"이라고 다독였다. 

1985년 9월.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민청련 사건'(전두환 군사정권이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한 일)으로 22일 간 고문을 당한 고(故) 김근태(1947-2011)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실화를 다룬 영화 <남영동1985>가 막을 내렸다.  

이 영화는 5.16 군사쿠데타로 군부독재 시대를 연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된 이후의 '신군부 독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2월 12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80년 5월 광주를 유혈 진압한 뒤 9월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정희 독재 18년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 독재 8년이 이어졌다. 

영화 '남영동  1985' 포스터 / 사진. '남영동 1985' 공식 홈페이지
영화 '남영동 1985' 포스터 / 사진. '남영동 1985' 공식 홈페이지

신군부는 경찰 공안수사당국을 통해 "빨갱이와 반체제 인사를 색출한다"며 남영동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만들고 신군부를 비판하는 민주화 세력을 구금해 고문을 가하는 등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

군부정권을 비판하면 "반체제" 인사가 되고 민주화를 주장하면 "빨갱이"가 되는 당시의 한국 근현대사 부조리를 보여준다. '애국'을 입에 올리며 폭행을 가하는 고문기술자 이두한(배우 이경영)은 실제로 당시 김근태 상임고문을 고문했던 이근안을 대변하고 어두운 복도에서 울리는 많은 이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은 김근태 이외에 국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한다.    

고문기술자들은 형광등 하나만 켜진 어두운 대공분실로 종태를 끌고 와 구타를 하고 물이 담긴 욕조에 몸 전체를 거꾸로 박는다. 무릎 관절 사이에 야구방망이를 끼우고 허벅지를 내리 찍고 어깨 관절을 탈구 시킨다.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얼굴에 수건을 덮고 숨 쉴 틈 없이 코로 물을 들이 붓고 고춧가루 한 움큼을 입과 코로 넣기도 한다.

종태는 그들이 원하는 답을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고문을 견뎠다. 그러나, 인내심이 길어질수록 고문 강도는 점점 세졌다. 이두한은 급기야 칠성판 위에서 종태를 전기고문까지 한다. 결국, 3주간의 '공사(고문의 은어)' 끝에 종태는 허위 자백을 하고야 만다. 종태의 민주화에 대한 가치관과 가장으로서의 양심은 몇 번이나 파괴됐다. 군사정권은 종태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망가뜨렸다. 

종태가 거짓 증언하자 박수를 치는 고문기술자들 / 사진.'남영동 1985' 공식 홈페이지
종태가 거짓 증언하자 박수를 치는 고문기술자들 / 사진.'남영동 1985' 공식 홈페이지

그를 고문하던 강 과장(배우 김의성), 김 계장(배우 이천희), 박 전무(배우 명계남), 백 계장(배우 서동수), 이 계장(배우 김중기), 윤 사장(배우 문성근)은 어떤 사람일까? 악귀? 악마? 악당?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군부정권을 떠받치던 세력은 당시를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종태를 고문하면서 애인과 싸운 얘기를 하고 승진을 걱정하며 '해태타이거즈'와 '삼성라이온즈' 야구 경기를 빼놓지 않고 라디오로 들었다. 또, '선데이서울'을 보며 농담을 하고 가족 안위를 걱정했다.

'폭력'의 탈을 쓴 이들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시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이해할 수 없었고 폭력에 침묵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애인'과 '승진', '해태와 삼성', '선데이서울'보다 중요치 않았다. 오직 종태의 자백으로 빠른 승진과 퇴근만을 바랐다. 종태가 자신을 던지면서까지 바라던 민주주의는 "포기하면 빠르고 좋은 것"이었다.

이 같은 군부독재 시대는 종태와 같은 민주화 열사들의 열망과 투쟁으로 1987년 무너졌고, 이후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대로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다. 26년 만에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가 종식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래 불러보고 적어봤던 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2012년 12월 19일. 박 대통령 딸인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51.6%의 득표율을 얻어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헌정 사상 한국의 첫 여성대통령이자, 처음으로 부녀가 대통령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박 후보는 당선 직후 지상파TV 3사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승리"라며 "국민께 드린 약속, 민생을 실천하고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말했다.

종태를 고문한 1985년 남영동의 평범한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민주주의보다 승진과 애인, 야구와 잡지를 믿었다. 그렇다면, 2012년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박 후보의 어떤 모습을 보고 과반 이상의 투표를 한 것일까? 그는 대통령으로써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다만 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시민들의 열망이 이뤄지길, 1985년 남영동이 재현되지 않길, 아버지 시대를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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