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없는 것 ― 존경, 책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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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대구도시철도 3호선 문제를 보며 꾸리찌바를 생각한다


꾸리찌바 배우기


브라질의 꾸리찌바 시는 이제 우리 사회에도 잘 알려진 도시이다. 1996년《녹색평론》에〈희망의 도시, 꾸리찌바〉라는 기사가 처음 실린 이후, 여러 방송사가 앞다투어 이 도시를 직접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고, 단행본으로 나온《꿈의 도시 꾸리찌바》(박용남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는 공무원과 도시행정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널리 읽히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이 책의 저자는 지난 10여 년간 전국의 자치단체와 전문가 그룹, 시민단체들이 개최한 강연회와 토론회에 셀 수 없을 만큼 초대되기도 했다.

2001년부터 불었던 국내의 ‘꾸리찌바 배우기 열풍’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가 겪어야 했던 극심한 부의 불균형과 양극화, 공동체의 파괴, 그리고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지구적 차원의 환경 위기 앞에서, “지구에서 환경적으로 가장 올바른 도시”, “지속 가능한 풍요가 실현되는 도시”, “환경과 공동체를 보호하면서도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도시”, 그래서 시민의 대부분이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도시”라는 안팎의 평가를 받는 브라질의 한 변방 도시의 사례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꾸리찌바 배우기 열풍’이 불 때, 대구시 공무원들도 꾸리찌바 시의 대중교통 정책 등 ‘도시행정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들었다.《꿈의 도시 꾸리찌바》저자를 초청해 여러 차례 강의를 듣고 토론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일부 관계 공무원들은 직접 꾸리찌바 시를 방문해서 배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시의 뜨거운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구시 공무원들이 꾸리찌바 시의 ‘도시행정 혁명’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만한 충분한 증거는 이제까지 없었던 것 같다. 그 ‘혁명’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시민에 대한 ‘존경’이다. 꾸리찌바 시가 ‘꿈의 도시’, ‘희망의 도시’ 같은 별명 외에 ‘존경의 수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칭송받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 준다.

실제로 꾸리찌바 시의 다양한 정책과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과 노인, 장애인과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는 물론 자연환경을 배려하고 존경하는 정신이 그 밑에 깊고도 투텁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꾸리찌바 시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따지고 보면 겉으로 보이는 정책과 아이디어가 아닌, 그 밑바탕에 깔린 정신과 철학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 부실특혜와 안전성 문제


최근 대구도시철도 3호선에 대한 감사원 감사결과 발표와 그에 대한 대구시 정부의 태도를 접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을 느끼면서, 한때의 ‘꾸리찌바 배우기 열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대구시 관료-공무원들은 ‘꾸리찌바’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여러 차례 보도된 바와 같이, 대구도시철도 3호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요예측 부풀리기, 차량선정 특혜, 사업비 낭비, 재해방지 대책 소홀 등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지난 4월 30일 감사원 발표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대구시는 3호선을 ‘명품 모노레일’, ‘최첨단 랜드마크’로 홍보하면서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왔다. 그동안 안전성 등 시민들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경제성과 최첨단 시스템을 명분으로 모노레일 공사를 강행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허위와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 이번 감사결과 드러난 것. 더구나 열차안전과 직결되는 안전인력의 운영비조차 고의로 누락하여, ‘세계 최초 모노레일 무인운전’이라는 무지막지한 ‘실험’으로 대구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내몰려 하는 데 대한 우려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더더욱 대구시민들을 분노케 하는 것은 이러한 감사원 발표 이후, 정작 대구시민들에게는 단 한마디 사과도 없이, 감사결과가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하고 해명하기 급급한 대구시장과 공무원들의 태도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교통수요 과다예측 지적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심 경관을 감안해 모노레일로 변경한 점과 관련해 제기된 각종 의혹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교통수요 과다예측’만 하더라도 사실은 매우 심각한 흠결사항일 뿐만 아니라, 3호선 모노레일이 과연 ‘도심 경관’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대구시민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길게 말하지 않겠다.)

감사원 발표를 접하고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는 시민들, 안전성에 대한 심각한 불신과 불안감을 느끼는 대구시민들 앞에 우선 머리 숙여 사과부터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일단 반박부터 하고 보자는 이 안하무인, 오만불손한 태도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시민들에 대한 ‘존경’이라고는 털끝만큼도 갖고 있지 않은 대구시장과 공무원들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안전한 3호선 만들기 강북주민모임’ 같은 풀뿌리 단체는 이번 감사결과에서 드러난 “대구시의 도시철도 3호선 문제는 실수가 아니라 계획된 범죄행위”라고까지 규탄했겠는가.      

또, 지난 5월 6일 대구지역의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각종 부실특혜로 얼룩진 3호선 경전철 사업에 대한 명백한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또 “시민안전과 편의를 위협하는 무인운영을 철회하고 안전과 생명을 제1원칙으로 하는 도시철도 3호선을 추진할 것”,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감시하는 ‘시민안전위원회’를 구성할 것” 등을 촉구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되도록 아직까지 그날의 악몽과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대구시민들로서는, 이러한 요구와 주장은 너무도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다.   

존경과 책임의 관계

꾸리찌바에는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실종되어 있는 ‘정치’가 복원되어 시민들이 사는 장소는 물론이고 사람 개개인도 바꾸어놓고 있다. 그것은 시 당국이 꾸리찌바 시민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꾸리찌바 도시계획연구소 소장이었던 오스발도 나바로 알베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면 더욱 분명해진다. “당신이 사람들을 존경할 때, 그들 역시 당신을 존경한다. 사람들은 시가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책임을 다하기 시작한다.”
―《꿈의 도시 꾸리찌바》285쪽  


꾸리찌바와 반대로, 시민을 존경하지 않는 행정은 결국 시민의 ‘무책임’을 낳는다. 그러한 불경(不敬)의 행정이 고착화되면 시민들은 어느새 스스로에 대한 존중심(자존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도시 전체는 자기모멸과 무기력의 분위기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것은 곧 하나의 도시가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제’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따금 다른 지역 사람들이 대구를 깔보면서, 또는 우리 스스로 자조적으로 쓰곤 하는 ‘고담도시’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은, 어쩌면 이러한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제’에 붙인 은유일지도 모른다.

‘조직화된 무책임의 체제’는 바꾸어 말하면 ‘정치’가 실종된 시스템이다. 정책과 행정, 예산 등에 대한 토론과 경쟁이 사라진 도시, 선거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는 도시, 변화에 대한 희망이 봉쇄된 도시… 그것은 정확히 ‘꿈의 도시’, ‘희망의 도시’, ‘존경의 수도’의 정반대편에 있는 다른 도시의 풍경이자 좌표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놓고 보면, 대구시장과 시 정부가 안하무인, 오만불손, 시민에 대한 불경으로 일관하는 것에는 그들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결코 ‘존경’받지 못하는 시민들, 그래서 자신의 ‘책임’을 망각하는 시민들, 그리하여 마침내 ‘정치’의 힘을 불신하고 혐오하기까지 하는 시민들이야말로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세력, 기득권 동맹에게는 더없이 좋은 서식환경 아니겠는가.      

'시민의 주권'과 정치의 복원

저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면, 이제 시민들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시민의 주권’을 되찾고, 아래로부터 정치를 복원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합법적 신분 보장’을 의미하는 소극적 ‘시민권’이 아닌, 한 도시의 권력주체로서 가진 ‘정치적 힘’을 뜻하는 적극적 의미의 ‘시민의 주권’ 개념이 지금 우리 대구시민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이 나라 헌법의 으뜸 정신이라면, 대구시의 모든 권력 역시 이 도시의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이치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구시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시장과 관료들, 어용전문가와 토호언론들은 이러한 이치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특권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제 그들을 비난하고 있을 틈이 없다. 우리 시민들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그리고 시민들 스스로 방조해 온) 한 정당의 독재질서와 강고한 기득권 동맹 구조 속에서, ‘시민의 주권’을 포기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프게 물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과 각성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정치적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무력감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없이 이 도시의 미래를 갉아먹는 기득권 동맹에게는 최고의 숙주(宿主)다. 이제 스스로 그러한 숙주로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대구시의 주인, 지역의 주권자인 시민으로서 깨어날 책임, 그리고 정치를 복원할 의무가 지금 우리 모두에게 있다.






[변홍철 칼럼 21]
변홍철 / <하이하버연구소> 소장,  전 《녹색평론》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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