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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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식 / 『이 여자, 이숙의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
| 이숙의 저 | 삼인 | 2007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
매우 특별하게도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짧은 말씀이다. 과거 자취 시절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그거 저번에 빌려 보신건데요?”라는 말을 종종 듣던 나는 그런 파트의 뇌세포 기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유독 한 문장은 아직도 생생하게 내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 이숙의 선생의 유고집 414쪽,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 아마도 그 지점에서 더 이상 읽어 나가지 못하고, 한 참을 쉬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리고 진하게 흘렀던 눈물도 생생하다.

일본 침략에서부터 전쟁, 분단 그리고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던 2000년 615공동선언까지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그 속에 32년의 짧은 삶을 살다 간 어느 혁명가와, 그 시대를 다 살았지만 그 내면에는 ‘그이’와의 짧은 만남의 시간을 눈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림과 신뢰로 살다 간 이숙의 선생의 발자취를 보면서 역사의 아픔보다는 생명체로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 신념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지금의 세상은 이숙의 선생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깊게 고민하게 된다.

해방 직후 둘은 20대의 젊은 나이로 만난다. 여성은 인텔리였고, ‘그이’는 정규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으나 항일투쟁을 한 좌익의 젊은 지도자였다. 1947년 하객이 없는 결혼을 하고 ‘그이’는 홀로 월북을 하고, 이듬 해 -50여 년이 지나 이 책을 마무리하게 되는- 딸이 태어난다.
 
 
 
전쟁 중에 피난을 하면서도 이 여성은 오직 ‘그이’만을 만나기 위해 온 정신을 어느 한 곳에 집중 시킨다. 그 곁에는 언제나 어머니와 딸이 함께 한다.

그 토록 기다렸던 ‘그이’는 끝끝내 연락 한 번을 남기지 않고 빨치산 사령관으로 최후를 맞는다. 보안이 해제된 미국의 자료에 의하면 ‘Guerrilla Leader, Pak Chong-Gun. Commander of the 3rd Paftisan Branch, killed on 17. Feb. 52'로 기록된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생사에 대한 확신은 하지 않으려 하는 듯 하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려 온갖 고초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는 많은 책과 영화와 어른들의 말씀 속에서도 접했다. 그러나 이숙의 선생과 가족에 대한 탄압은 생존 그 자체가 다행이고 기적적인 일이다.


세월은 흘러 딸이 살고 있는 독일로 간다. 아니 한국을 떠난다. 거기에서 삶에 대한 기록을 준비하며, 손주들의 교육과 여행 등으로 한국을 오간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이 있던 2000년 자서전 준비로 한국에 왔다가 대구에서 갑자기 쓰러진다. 그러나 곧 회복된다. 독일에서 딸이 급하게 찾아오고, 서울에서 어느 노인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내려온다. 중환자실에서 곧 일반병실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호전 되었다는 담당의사의 의견도 있다. 우연하게도 딸이 없는 병실에서 그 노인과 짧은 대화를 오간다. 노인은 다시 자신이 평생을 가고자 했던 곳을 가기 위한 준비로 서울로 떠난다. 그날 밤 그녀는 편안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급하게 내려와 조문을 하고 간다.

2007년 여름 대구구치소에서 <이여자, 이숙의> 신문광고를 보고 바로 도서구입을 신청했다. 징역에서 도서를 주문하면 참 오래도 걸리는데 약 1주일 정도 되어야 들어온다. 그 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이 책을 신청하고는 더 그랬다. 몇 권의 책 중에 비교적 두텁했던 ‘이숙의’가 적힌 제목의 책을 찾자마자 고요한 독거의 도움을 받으며 집중해서 읽었다.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라는 지점에서 도저히 다음 줄로 눈을 넘길 수 없었다.

나는 화물노동자의 노동조합인 화물연대에서 상근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현장에 와서 트레일러를 운행하며 주로 컨테이너를 운송하고 있는 화물노동자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중요성을 대단히 높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노동조합에서 조합원이나 간부를 만날 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늘 ‘의리’를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어느 선배를 통해 전수 받은 건데 내 자신 스스로 그걸 ‘의리론’이라 이름 붙이고 좀 더 확장해 나갔다. 후배의 연애 상담에서 노동조합의 목숨 건 파업투쟁까지 정말 ‘의리’를 많이도 써 먹었고, 그리고 잘 먹혀들었다. 그렇고 보면 임상실험 끝에 성공한 결과만 있었기 때문에 그냥 구라의 수준은 아니었던가 보다. 조폭이 등장하는 흔한 영화를 보더라도 관객은 의리 있는 건달에게 정을 더 많이 준다.

의리 있는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고, 의리 있는 사람은 배신하지 않고, 의리 있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알고, 의리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다. 약속 잘 지키고, 배신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알고, 동지를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의리 있는 사람이다.

이숙의의 ‘그이’ 혁명가 박종근 선생은 조국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사상에 대한 의리를 목숨으로 표현 한다. 책 속에 표현상 ‘사랑의 신뢰’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신뢰가 결여된 사랑은 성립 불가하지만 그대로 따른다면 이숙의 선생은 사랑에 대한 의리를 삶 전체로 표현 한다.

그리고 병실에서 만난 노인 양심수 김익진 선생은 남로당 경북도당위원장이자 빨치산 남부군 3지대 사령관인 박종근 선생의 명령에 따라 몇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숙의 선생 가족을 찾지 못했고, 결국 그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다 투옥되어 30년 감옥을 살고 615공동선언 정세로 북송되는 그 찰나 대구를 내려와 짧은 보고를 하게 된다. 애써 믿으려 하지 않으려는 이숙의 선생에게 ‘30년 감옥살이’를 증거로 제시하며 박종근 선생은 이숙의 선생과 가족을 언제나 ‘찾았다’고 의리를 확인시킨다.

지금도 평양 애국열사릉에는 ‘박종근 동지, 경상북도도당위원장, 1920년 4월 8일 생, 1952년 2월 17일 전사’라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고, 사진은 이숙의 선생이 보관하던 사진을 확대하여 가져다 놓았다. 묘비의 기록과 미국의 문서 기록이 일치하면서 박종근 선생은 비로소 실제 전사한 것으로 이숙의 선생은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논란되는 시대, 조국통일의 씨앗 개성공단이 위협 받는 시대, 노동조합이 강력해서 공공의료기관을 폐업시키는 시대, 노동자이나 노동자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나아가 법적으로도 노동자이나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를 우리는 대부분 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끼리 진정한 ‘의리’ 필요하며, 노동조합은 그것을 ‘단결과 연대’로 실천하고, 진보정당은 구동존이의 정신으로 재무장하여 평등, 평화가 자리 잡는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면,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이숙의 선생에게 한 명의 독자의 인연으로 한 의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 합니다.
 
 
 





[책 속의 길] 102
이오식 / 화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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