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 미디어활동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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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용길 /『알튀세르 효과』(진태원, 김정한, 박기순, 서관모, 서동진 저 |
강희경, 김은주, 장진범 역 | 그린비 | 2011)


허허벌판에 뛰어든 지 1년이 지났다. 쉽지 않은 일. 뒤늦게 알게 됐지만 ‘언론’은 그런 것이었고, 대구는 그런 곳이었다. 기자라는 호칭이 제법 익숙해질 법만도 한데, 불편한 구석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자는 직업일 뿐이기 때문에. 교사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사회가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있듯, 기자가 자신을 기자로만 호명한다면 언론과 기자를 향한 이데올로기에 갇힌다. 다른 이가 나더러 기자로 부르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자라는 직업에 요구되는 역할에만 갇히지 않기 위한 자발적 암시다. 그래서 스스로 미디어활동가라고 되새긴다. 오늘은 미디어활동가 앞에 ‘맑스주의’를 붙여본다.

1년의 시간 동안 부족한 기자 생활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기자는 눈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언론에도 적용된다.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라는 구분뿐 아니라 언론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역시 마찬가지다. 후에 말하겠지만, 언론의 중립성이라는 가치는 얼토당토 안은 이야기다. 언론을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차이다. 맑스주의 미디어활동가이기 위해 알튀세르를 다시 읽는다.
 
 
 
알튀세르를 처음 만난 건 세상과 맞짱 뜨면 혁명이라도 일어날 거라고 여겼던 이십 대 초반이었다. 두발단속과 학교폭력에 반항심 많았던 소년이 대학에 기대한 건 변혁에 대한 갈증해소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처음 만난 선배부류는 나를 억압하는 존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다른 부류의 선배를 통해 접한 것이 알튀세르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그리고 ‘호명’이었다. 

알튀세르는 국가는 국가장치만이 아니라 국가 권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국가장치를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구분한다. 이는 알튀세르를 처음 접했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우리가 흔히 사적 영역이라고 여기는 가족과 종교, 심지어 교실에서도 국가장치는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은밀하게 조직하기 위하여.


“억압적 국가장치와 구분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는 교육적인 장치와 가족 장치, 종교적인 장치, 법적인 장치, 정치적인 장치, 노동조합 등이 포함된다. 억압적 국가장치는 이른바 ‘공적 영역’에 속해 있으며,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조직되어 있다. 반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이른바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뚜렷한 통일성을 유지하지 않은 채 때로는 서로 갈등과 모순을 빚을 수도 있다.”

“이처럼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간주되는 여러 제도들을 알튀세르가 ‘국가장치’라고 부르는 이유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자유주의-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알튀세르 효과』「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p.89


예상하듯 언론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겪으며 언론탄압을 피부로 겪었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MB정권의 무능이 드러난다. 언론을 은밀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작동하게 두지 않고, 억압적 국가장치로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땡전뉴스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언론의 민주주의가 실현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언론의 지배구조와 그 실천양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론민주화라고 착각할 때 다른 성질의 언론을 만들 수 없다. 이는 한편으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자유주의-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실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주의 이데올로기가 있고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도 존재하며,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으로 조직될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국가 이데올로기도 존재한다.”
-『알튀세르 효과』「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p.97


이데올로기를 종말 또는 제거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언론의 중립성을 강조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가 있듯, 이를 드러내는 언론이 있을 따름이다. 이는 언론활동의 과정 즉, 언론운동의 실천 과정에서 드러난다.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구분이 모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 진보라는 규정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기자라는 호명에 만족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호명의 첫 번째 논점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작용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있는 개인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알튀세르 효과』「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p.97


언론이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면 기자 또한 마찬가지다. 기자에게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는 마치 교육노동자와 공무원노동자의 권리 박탈을 향한 정당성 강요와 맞닿아 있다. 교사가 교육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데서 오는 특수함은 종종 그들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멀리하게 하며, 오직 ‘교사’만이 ‘교육’을 수행하는 존재로 호명한다. 해방을 위한 교육으로 나아가길 방해하는 것이다. 기자 또한 마찬가지다. 기자라는 직업을 수행하는데서 오는 특수함은 그들이 노동자임을 망각하게 하며, 때때로 퇴근 이후의 생활까지 제약한다. 그리고 그들만이 기록하고 기사를 쓸 수 있는 존재로 호명한다.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가능한 요즘에도 그들만의 특권은 여전한 이유다. 기자가 선택한 것이 사회의 중요한 이슈여야 한다는 것, 기자의 눈으로 취사선택한 사실을 감춘다. 또, 정보접근권을 독점해야 한다는 오만을 내면화한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처음부터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상이한 과정을 거쳐(더욱이 이는 각 나라의 경우마다 상이하다) 형성된 집단들이 자본주의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양자가 각각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효과』「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p.99


언론의 역할과 시선 또한 상이할 수밖에 없다. 이를 내 식대로 가져오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언론과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한 언론이 다르다는 것, 부르주아 언론과 비(非)부르주아 언론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중언론과 지역언론의 역할과 실천을 고민하게 된다.

“알튀세르가 제시하는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에 의한 주체화/복종화’는 주체화/복종 양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푸코와 라캉의 이론화는 주체화/복종 양식들에 대한 탁월한 이론화의 사례들이다. 발리바르는 주체화/복종 양식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구성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알튀세르의 ‘호명에 의한 주체화/복종’ 양식의 이론에 의거하면서, 또 다른 주체화/복종 양식의 이론들의 요소들, 특히 라캉의 개념들을 활용한다.”
-『알튀세르 효과』「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에게로」 p.645-646


이러한 발리바르의 ‘이론적 브리콜라주’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언론의 모델 역시 특권화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알튀세르는 ‘단일한 역사’의 무대를 설정했지만, 발리바르는 알튀세르를 통해 ‘또 다른 무대’라는 의미를 도입하듯, 미디어활동가의 실천 형태는 다양한 방식과 결합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치스러운 연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치스러운 철학 또한 존재한다. 수치스러운 철학이란 사변으로 병들어 있는 철학이다. 수치스러운 연극이란 미학주의로 병들어 있는, 연극성으로 병들어 있는 연극이다...”...곧 ‘해석’이었던 철학을 ‘변혁’을 위한 철학으로 바꾸기를 종용하는 권고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전혀 다른 층위의 정식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효과』「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p.201-202

“알튀세르의 예술론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의 예술론이 저 마주침 혹은 우발성의 유물론 속에서 어떤 좌표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역설 안에서이다. 알튀세르의 미학은, 그 자신의 미학을 미학으로서 (재)생산하지 않는 한에서, 그리고 그러한 미학적 문제가 미학적 문제 외부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한에서,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그 미학적 효과의 내적 구조 안에서 이해되는 한에서, 하나의 ‘미학’일 수 있다.”
-『알튀세르 효과』「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p.201-202


미학에 관한 알튀세르의 (비)미학은 언론성에 병들어 있는 언론이 아님을 고민하게끔 한다. 언론을 다른 어떠한 언론으로 규정하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요구하는 전혀 다른 층위의 비(非)언론의 길을 고민하고 만들어 가는 것.

실은 맑스주의와 미디어활동에 관한 고민의 시작은 이 책의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이는 특수한 새로운 이론을 창조한 것도 아니며, 그저 알튀세를 실천하는 그 자체다. 알튀세르 사망 20주기를 맞아 출간한 이 책은 알튀세르를 기리지도, 그의 사상을 위대하다고 찬송하지도 않는다.

엮은이 진태원이 “철학은 자율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그 자체로는 무에 불과하며, 소멸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한다고 역설했던 사람이 바로 알튀세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순히 생몰 연대만을 이유로 그에 관한, 거창하다면 거창한 논문집을 기획하는 것은 알튀세르 자신의 지적 원칙, 철학적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서문에서 밝히듯 알튀세르 사상이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변용되거나 지양되고 있는지 검토하기 위해 이 책은 출판됐다. 

마지막으로 대구에서 언론을 한다는 것,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미디어활동가로 살아가는 일이 미친 짓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 더불어 언론의 길이 나의 의지만으로 돌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게 인지하며, 유물론과 관념론의 단선적 구분이 아닌 우발성의 유물론을 고민하며 알튀세르를 읽는다.

“프로이트에게서 그 명칭을 빌려 왔지만 알튀세르가 독자적인 작업을 통해 이론화한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은 역사적 이행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이다. 곧 이 개념은 알튀세르 자신이 지적하듯 이 왜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인 러시아에서만 혁명”이 가능했고, “왜 러시아에서 혁명은 승리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변증법의 차원에서 대답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알튀세르는 ‘가장 약한 고리’라는 레닌의 용어를 원용하여 맑스주의 모순 개념의 특징을 설명한다. 알튀세르의 논점은 사회주의 혁명과 이행, 따라서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의 모순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좋은 측면’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고 ‘나쁜 측면’을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또는 자본과 임금 노동 사이의 모순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인 모순만 사고해서는 혁명에 관해서, 맑스주의 정치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튀세르 효과』「과잉결정, 이데올로기, 마주침」p.79-80

 
 
 





[책 속의 길] 101
천용길 / 대구경북 민중언론 '뉴스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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