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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피해자 강창덕, 아흔에도 사무치는 '통일학교'의 꿈
일제·미군정·자유당·유신에 7번 투옥, 13년 옥살이...국정원 13억 빚에 한숨 "후진양성 마지막 기회라도"
2017년 06월 15일 (목) 17:00:41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movie@pn.or.kr

   
▲ 인혁당 피해자로 올해 구순이 된 통일운동가 강창덕 선생(2017.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통일을 위해 한 길을 걸어 온 아흔 노(老)투사 강창덕 선생 얼굴에 그늘이 졌다.

4년전 날라온 종이 한 장 때문이다. 채권자는 대한민국 정부 국가정보원, 채무자는 강 선생이다. 오늘까지 국정원에 진 빚은 원금 6억8천9백만원에 이자 5%. 망백(望百)을 앞두고 13억원 빚쟁이가 됐다.

1974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년 8개월 복역을 한 강 선생. 200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오랜 멍에를 벗었다. 이후 국가를 상대로 한 1,2심 민사소송에서 22억원 배상 판결을 받아 15억원을 미리 지급받았다. 하지만 4년전 박근혜 정부 당시 국가는 배상금이 과지급됐다며 일부를 다시 돌려달라고 강 선생 등 66명을 상대로 소송을 했다.

7번의 투옥과 13년의 감옥살이에도 통일을 꿈꾸며 대구지역에서 언제나 현장을 지켜왔던 그. 머리부터 발끝까지 깔끔히 의관을 정제하고 지팡이를 짚은 채 후배들 앞에 섰던 그. 통일을 얘기할 때면 아이처럼 눈빛을 빛내는 그.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모진 고문도 견뎌왔던 그. 통일을 위해서라면 정당과 시민단체를 가리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는 그. 강 선생이 한숨을 내쉰다.

   
▲ 지팡이를 짚고 6.15선언 17돌 기념식에 가는 강 선생(2017.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6.15남북공동선언 17돌 하루 전날인 14일. 대구 오오극장에서 만난 강 선생. 분단 후 남북 정상이 최초로 만나 통일을 논의한 6.15공동선언 17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평화영화제와 6.15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아흔 통일운동가는 약속 시간 30분 전 지팡이를 짚고 버스에서 내렸다. 

한참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다 빚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강 선생 얼굴은 금방 어두워졌다. "오도가도 못하는 빚쟁이다. 고문조작해 무기징역까지 9년을 옥고를 치뤘는데 다시 돈을 달라니. 이명박, 박근혜 9년 한(恨)은 태산보다 높은 분노만 남겼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 선생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강 선생은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한다고 경제활동을 제대로 못했다. 밥집, 인쇄소, 호프집도 해봤는데 경찰들이 가게에 와서 겁박을 하고 감시를 하니 다 망했다"면서 "그러니 부채가 많았다. 보상금으로 빚도 갚고 기부도 했는데 이제 무자비한 국정원에 의해 채무자가 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 때 강 선생은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나쁜 마음도 먹었다고 했다. "중앙정보부 마당에 가 유서를 쓰고 분신자살을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죽어 뭐 하겠나. 끝까지 살아남아 굳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한많은 세월"이라고 말했다.

   
▲ 먼 곳을 보며 옛 사건들을 회상하는 강 선생(2017.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빚은 노년의 마지막 꿈도 발목 잡았다. "배상금 나머지로 통일학교를 만들어 말년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 먹었다. 대규모는 아니어도 소규모학교를 만들어 통일 일꾼들을 키우고 싶었다. 그렇게 통일교육을 하며 후진양성을 하다 통일을 맞고 싶었다. 그런데 그만 국가권력에 의해 다시 꿈을 뺏겼다. 기회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무친 꿈을 얘기하다 강 선생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통일에 대한 강 선생의 이 같은 강렬한 꿈은 일제강점기 후 생각치도 못한 분단을 지켜보며 시작됐다. 대구상업학교(현재 대구상원고) 학생이었던 1947년 강 선생은 웅변대회에서 미군을 비방해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그곳에서 10월항쟁으로 구속된 감방장으로부터 '야성(野星)'이라는 호(號)를 받았다. 강 선생은 "호값한다고 한 평생 가시밭길"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럼에도 "후배들 앞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못난 선배는 아니였는지 부끄럽기만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10년만에 찾아온 좋은 기회다. 문재인 대통령이 1,700만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 된만큼 6.15선언의 민족적 가치와 의미를 되살리길 바란다. 후배들도 평화통일을 위한 주춧돌을 놓아야한다. 통일 앞에 굳건하라. 나도 현역으로 뛰는데 훨씬 젊고 능력도 뛰어난 후배들이 못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 5.18항쟁 37돌 대구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강 선생(2017.5.18)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강창덕 선생은 1927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광복 전 1944년 17살 나이로 만주독립군 활동을 얘기하다 반일사상 고취 혐의로 구속됐고 1945년에는 일본해군지원병 입대를 피해 도피하다 구속됐다. 광복 후인 1947년 학생웅변대회에서는 미군정 포고령위반 혐의로, 1952년에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61년에는 반공법제정반대 집회 등으로 2차례 구속돼기도 했다.

이어 건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56년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에 정치부 기자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고 2년 뒤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겼다. 그러다 1960년 사회당 경북도당 선전·조직위원장을 시작으로 1967년 '반독재 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추진위원회' 활동과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상임공동의장, 1993년 경산민우회 초대회장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고문을 받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8년 넘게 복역했다. 그러나 2006년 국무총리실 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아 2007년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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