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조작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 경찰에 끌려간 지 일주일째.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시지 않았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데 선생님이 조용히 교실 밖으로 소년을 불렀다. "가방을 싸서 집에 가라"는 말이였다. 어느 정도 예감이 들었다.
집에 가니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거리에 사이드카 엄호를 받는 검은색 봉고차가 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 절차는 순식간에 진행됐다. 시신을 염한다며 아들인 자신에게 와서 보라고 했다. 15세 소년이 마주한 아버지 시신. 온몸에 피를 쏟은 자국이 보였다. 사형의 흔적이다.
● 부서진 가장들, 청년들 8명의 이름
1975년 4월 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에 연루된 8명에 대해 국가는 사형을 집행했다. "국가 전복을 모의"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다. 사형을 언도한 지 하루도 채 안돼 18시간 만에 사형이 끝났다.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8명의 젊은 가장들, 청년들, 지식인들은 작은 항변도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이름은 김용원(41), 도예종(52), 서도원(53), 송상진(48), 여정남(32), 우홍선(46), 이수병(40), 하재완(44)이다.
인혁당 이후 벌써 5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억울하게 숨진 이들 뿐만 아니라 남겨진 유족들 삶도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조작된 사건의 희생자들이 재심을 통해 국가로부터 무죄(2007년 서울지방중앙법원)를 선고 받기 전까지 인혁당 낙인은 유족들을 따라다녔다.
● 사형수 가운데 가장 먼저 희생된 이 '서도원'
서도원씨의 아들 서동훈(64)씨는 28일 오전 대구 수성구 한 카페에서 지난 50년 세월을 담담하게 회고했다.
그가 이날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억압"이다. 한때 신문사 기자로, 대학 교수로, 이제는 3남매의 아버지로, 남편으로 일상을 살다가도, 불쑥 50년 전 4월 9일 그날 소년이던 그때로 돌아갔다. 아무리 풀어도 풀리지 않는 난제처럼 그에게 인혁당은 평생 숙제다. 국가폭력의 그림자는 강력하게 그를 지배했다.
2시간 넘는 인터뷰 시간 동안 웃음만큼 많았던 것은 그에 눈에 계속 맺혀있던 눈물이다. 아버지를 떠올리고, 4월 9일 당시를 기억하고, 50년 세월을 돌아보는 내내 고통스러운 장면들이 하나씩 그를 스쳐갔다. 다시 한번 그날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게 죄스러웠다. 15살 소년으로 돌아간 그 당시를 떠올렸다.
● 유족에게 14년간 이어진 지독한 감시와 낙인 '국가폭력' 족쇄
"'뭐 저런 놈이 있어?' 이런 말을 많이 들어요. 나중에 저를 알게 되면 익숙해져요. 나는 동창회도 안나가고, 각종 협회도 탈퇴했어. 그렇게 무리지어 살지 않았어. 감시 받은 자의 자기 보호 본능일 수 있어요"
1974년부터 1988년 6월까지 국가로부터 서도원씨 가족이 감시를 당한 세월은 무려 14년이다.
"우리 집을 감시하는 게 직업이라서 밥을 먹고 사는 정보과 형사가 있었어. 자기가 하는 일은 그거 하나 뿐이야. 우리 모친은 그 사람 그림자만 봐도 치를 떨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소통하는 몸짓을 취해야 돼"
아들로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시 경찰과 친해져야 했다. 나중에 기자(영남일보)가 된 그를 파출소에서 만난 감시 경찰도 있었다. 그를 보고 깜짝 놀라던 경찰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떻게 니가 기자가 될 수 있어? 라는 얼굴 표정이었다. 우리를 '폐족'이라고 생각했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중에 그 경찰이 한 식당에 가서 나를 붙잡고 대성통곡하더라고. 이유는 모르지"
"당시 경찰은 경비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어머니가 어디 행사에 다녀오면 집 벨을 누른다. '어디 다녀오시냐'고 묻는다. 나는 살기 위해 집에 들어오시라고 말하고 바둑도 두고 밥도 먹고 그렇게 했다"
한번은 감시 경찰이 바뀌었다. 서도원씨 집을 '출입'한 한 경찰이 그를 협박한 것이다. "그가 모친 몰래 뒷문으로 나와서 나에게 협박을 하더라고. '학교에 알리겠다(인혁당 사건 유족)'고 말이야"
인혁당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게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국보법 위반자, 사형수의 아들이 알려지는 것은 곧 '빨갱이' 낙인이다. 사회적 매장과 다름 없었다. 하지만 17세 소년은 참지 않았다.
"경찰에 항의했더니 다른 사람으로 바뀌더라. 나는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정의감 이런 건 별로 없다. 나를 안건드리면 나도 안건드린다. 아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국가폭력이라는 위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무언가를 겪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은 한 번 당한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 어머니도 모진 고문 당해...더 심한 억압과 노이로제
국가폭력은 지독하게도 이 가족을 괴롭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5년이 흐른 1979년에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어머니인 배수자(92)씨를 경찰이 영장 없이 끌고 갔다.
'남민전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어머니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주일 두드려 맞고 겨우 풀려났다. 기록도 증거도 없으니 국가폭력에 대해 지금까지 어떤 문제 제기도 못했다. 서동훈씨는 "어머니는 그때 참 많이,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며 "모친이 지금까지 아픈 계기가 그때 당한 고문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민전 사건은 1979년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으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목표로 결성한 단체다. 경찰은 당시 남민전과 관련 없는 인사들도 영장 없이 구금하고 폭행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그는 지난해 재심 신청 45년만에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 탓일까 배수자씨는 억압의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이로제(신경증) 수준이다. 방송사에서 인혁당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약속했다가, 방송 카메라를 보고 어머니가 볼 것 같다는 생각에 돌려보낸 적도 있다. 자식들이 약속이 있어 나가려고 하면 넘어갈 정도로 반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머니는 남편이 교수형 당한 뒤 사람을 만나고, 알려지고, 인터뷰하고 이런 것을 굉장히 싫어하신다. 노이로제가 걸렸다.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할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도 감시를 받으니까. 억압의 상태를 나를 초월하는 사람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도 가족들이 다 어머니 걱정을 했다. 그래서 TV를 못보게 했다.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어 대학생 때 지도교수가 가정 방문을 올 정도니 말 다 했다. 감시 체제는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조여왔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좀 괜찮아진 편이다"
● 너무나 따뜻했던 아버지, 서도원
그리고 사형수가 아닌 기자(전 대구매일신문 기자)로서 아버지, 교수(영남대 전신인 청구대 정치학 강의)로서 아버지, 침술사로서 아버지를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다. 스탠드 조명이 흔치 않던 시절 혼자 조명 기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또 늘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오후 9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책을 즐겨보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동식물을 사랑해 집에 개 40마리를 반려동물로 키우기도 했다. 또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했다. 한때는 침술 자격증을 따서 동네에 환경이 어려운 중환자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민중에 대한 구휼의 중요성을 아시는 분이었다. 화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다. 참 아버지가 보고싶다"
● 박정희와 박근혜 그리고 동대구역 동상
그에게 있어 가해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통령에서 탄핵된 가해자의 딸 박근혜. 그리고 피해자인 아버지와 피해자 아들인 자신. 그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박근혜씨에게 연민이 간다"고 말했다.
"20대에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돌아가신 게 박근혜씨다. 그 역시 억압을 당했다. 그런데 바보 같이 정치권, 권력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다른 형제들도 억압에 시달리지 않았나. 결국 나도 그들도 국가의 책임,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다. 그리고 이 국가폭력의 굴레는 핵처럼 분열한다. 계속해서 생성된다"
때문에 국가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집단이 성찰하고, 관련자들에게 어떻게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방안을 마련하고, 제시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 이게 쌓이면 가치관이 말살된다. 12.3 이후 사실상 정서적 내전 상태, 혼란스러운 시대를 맞은 것이 그와 연관돼 있다"고 덧붙였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동대구역 광장에 세운 박정희 동상에 대해서는 "나는 왜 그걸 세우지? 원래 그 앞으로 지나다니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더 다닐 일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동상도 하나의 상징을 세우는 것인데,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참으로 유치한 행위다. 박정희를 또 이용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동상을 세운 것도 다 없애는 마당에, 이 역시 일종의 기록 행위인데 역사를 끝없이 왜곡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홍준표 시장이) 동상을 세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들 방식인 것이다. 나 같으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다"고 했다. 다만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 인혁당 희생자 8명 얼굴을 레이저로 쏘아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퍼포먼스를 해보고 싶다"면서 "'철거'를 외치는 것도 좋지만, 만약 내가 한다면 문화적으로 맞대응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50주기,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의미 재조명되길
서동훈씨는 인혁당 50주기를 맞아 새로운 역사적 의미와 사실을 발견하길 바랐다. 아직 지역과 세상에 다 알려지지 않은 인혁당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인 서도원씨를 포함한 인혁당 희생자들이 꿈 꾼 세상은 '한반도 평화 통일'과 '대한민국의 완벽한 자주 국가 수립'이었다.
"아버지가 작고하시기 전 탐독하고 연구하던 것이 당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을 떠올려보면 자주 국가 수립에 자기를 던진 사람이다. 지금까지 인혁당에 주목한 부분은 억울한 희생인데, 이 담론 이후 이제는 더 많은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정답으로 치면 고작 1%만 드러난 상태다"
때문에 발견과 기록에 주목했다. 인혁당 재심 재판을 무죄로 이끈 것도 발견과 기록의 힘이라고 봤다.
"인혁당 관련 자료를 보려고 하면 국가기록원에서 보여주질 않았다. 한 사람이 꾀를 내 다른 사건을 통해 기록원 자료를 받았고 여기에 인혁당 관련 사건 파일도 있었다. 그리고 사형 집행 후 대통령 재가 사인을 찾았다. 위대한 발견과 기록의 힘이다. 앞으로 인혁당에 이 같은 발견과 기록이 더 필요하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5년 4월 9일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올해로 50주기를 맞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부의 조작으로 인해 8명의 가장과 청년들이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중 4명이 대구경북지역 출신입니다. '평화뉴스'는 당시 사건을 돌아보고 희생자들과 유족들, 관련자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통해 인혁당과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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