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 없는 가해자, 나의 선택이 동물에게 주는 고통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계대욱 /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이형주 글 | 책공장더불어 펴냄 | 2016)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말일 것이다. 인간은 잘 잊어버린다.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으나) <책 속의 길>이라는 평화뉴스 코너에 과분한 원고 청탁을 받고 잊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잊지 않고 있었지만 이러저러한 핑계로 미뤄두고 있다가 마감이 임박해서야 쓴다. 인간은 참, 망각의 동물이고 망각은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잊어버리려고 망각의 힘을 빌릴 때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고달파지는 때. 아는 게 힘이 아니라 오히려 알게 돼서 힘들어 질 때. ‘차라리 몰랐으면 속편하고 좋았을 걸’이라고 푸념하게 될 때. ‘아뿔싸, 그러나 어쩔 수 있나 이미 알아버린 걸.’ 그런데 이런 앎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시차가 있다. 당장 급한 일이 아니라 미뤄두게 되기도 하고 그 사이 이러저러한 핑계를 찾게 되기도 한다.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라는 책은 나에게 ‘아뿔싸’ 같은 책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잊고 지내던 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책이다. 이건 꼭 알아야 되는 일이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책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이 그 말에 딱 맞는 책이다. 길이 되어주는 책. 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 말이다.
 
 
 

햇수로 4년째, ‘환경운동’의 영역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아는 것보다 배우는 게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 4대강과 탈핵, 가습기살균제, 환경교육 등의 활동을 이어왔지만, 특별히 동물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활동을 해본 적은 없다. 인간의 무분별함에 훼손당하는 자연. 성명서에 하나씩 써내려가는 멸종위기종과 보호종의 이름. 야생동식물의 마지막 서식처와 삶의 터전을 지켜달라는 호소. 말하지 못하는 생명을 대변하면서 이따금 정작 내가 이 친구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반문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 묘한 갈증에 찾아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호기심이 가는 제목에 ‘나의 선택이 세계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부제가 쐬기를 박았다.

이 책은 24가지의 동물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는 어느 아이스크림 광고처럼 읽고 싶은 부분부터 골라 읽을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나 고르는 재미도 잠깐이다. 고르는 이야기마다 참혹하다. 그리고 그 참혹함은 어김없이 인간의 망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어쩌면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들이다. 잊고 지냈거나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들이기도 하다. 책 속에 펼쳐진 끔찍한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

좁은 공간에 맹수를 가둬 총이나 활로 쏴서 잡는 통조림 사냥 / 색소가 없는 알비노 동물들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모습 / 멸종위기종으로 보호한다면서 오히려 고기·약재·가죽 등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되는 호랑이 / 불법밀렵으로 유니콘 같은 전설의 동물이 될지 모르는 코뿔소 /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되는 동물학대의 악습 투우 / 명품 패션의 소모품이 된 악어와 뱀 가죽 / 숨은 동물 찾기를 해야만 하는 쇠창살 없는 파리동물원 / 일본 다이지의 돌고래 살육 현장 / 동물 쇼, 동물 체험 없는 공정여행 / 낙타 탓만 했던 메르스 사태와 구멍 뚫린 야생동물 방역 체계 / 세상에서 제일 비싼 루왁 커피의 비밀 / 구멍 뚫린 배에서 쓸개즙 채취당하는 사육 곰 / 수족관에 갇혀 줄초상 당하는 고래 / 학대로부터 구조된 코끼리들의 보금자리 코끼리자연공원 / 생명윤리와 동물복지 없는 복제기술 / 샥스핀 요리 때문에 지느러미만 잘리고 바닷속으로 버려지는 상어들 / 오메가3, 물범탕 등 하프물범 부산물 최대 수입국 한국 / 앙고라, 라쿤, 밍크 등 잔혹한 모피산업의 실태 / 사라져가는 서식처, 민가로 찾아든 코끼리와 멧돼지 / 생태계 파괴와 원주민 삶을 앗아가는 팜유 산업 / 절도·학대·불법유통·도살·공중보건까지 위협하는 아시아 개고기 산업 / 비인도적 할랄식 도축 논란 / 인위적으로 옮겨져 생태계교란종이 되어버린 외래종 / 동물원에서 태어나 더위로 죽은 북극곰

최근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에도 죄의식 없는 가해자를 본다. 지금껏 방관해온 우리사회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날 때마다 낯이 뜨거워진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지금 이 탄식을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에 가져와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 지경까지… 이렇게까지… 간신히 붙어있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새까만 눈동자만 끔뻑이는 말 못하는 짐승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문득 이런 상상도 해보게 된다. 만약에 ‘동물들이 미투(MeToo) 운동을 한다면?’,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SNS에서 스쳐지나갔던 일러스트가 떠오른다. 인터넷  검색창에 ‘동물과 인간의 입장을 바꿔’라고 치자 무수히 많은 이미지가 쏟아진다. 인간이 동물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만행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일상은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을 먹고 입고 쓰고 구매할 것인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런데 내 선택으로 지구 저편에 있는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산업이 유지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선택할 때 더 싼 가격이나 지금 당장의 편의가 아니라 다른 생명을 위한 선택을 하는 건 어떨까. 잠깐의 시간을 들이거나 조그만 불편을 감수한 내 선택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니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181쪽)

‘선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해시태그 되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영화 <매트리스>에서 모피어스가 양 손바닥 위에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놓고 주인공 네오에게 내어 보이는 장면이다. 파란 알약을 먹으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현실 ‘매트릭스’에서 지금껏 살아왔던 것처럼 똑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빨간 알약을 먹고 ‘매트릭스’에서 빠져 나오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세력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일까?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 이 책은 외면했던 현실 속에서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들을 담고 있다. 우리의 선택이 나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뭇 생명들과 함께 하는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나하나 징검다리를 놓는 일. 그게 내가 하고 있는 '환경운동'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망각은 참혹한 선택을 동반한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저질렀던,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과오들을 말이다. 만성망각증후군을 앓고 있는 인간들에게 이 책을 살포시 디밀어 본다. 마치 매트릭스의 빨간 약처럼. 언제나 선택은 당신 몫이고 당신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책 속의 길] 130
계대욱 / 대구환경운동연합 활동가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