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잣대, 해석을 거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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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민 / 『해석에 반대한다』(수전 손택 지음 |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


 수전 손택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고 그동안 믿었던 신화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되자 인류는 신화가 제공했던 기존의 가치들을 지키고, 현대적 요구에 일치시키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제우스와 레토의 간통은 사실, 권력과 지혜의 결합이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독자의 요구와 작품이 가진 명백한 의미가 서로 어긋나는 것을 전제로 예술의 진짜 가치는 작품 안에 내포된 ‘내용’에 있으며 진짜 예술을 음미하는 행위는 그것을 찾아내는 것, 즉 해석을 통해서만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은 예술가 고유의 스타일을 반대하고 예술과와 지식인, 그리고 독자와의 관계에서 예술가를 전적으로 해석을 가하는 주체인 지식인과 독자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게 만드는 해석에 반대하며, 궁극적으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수전 손택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녀가 쓴 비평 모음집인 <우울한 열정>에서 레니 피펜슈탈이 나치와의 관계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라는 인식에 항거하며 리펜슈탈은 나치의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나치예술이 추구하던 가치를(절대 가치에 대한 굴복, 나치 특유의 일방적인 폭력에 대한 동경,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 독재를 향한 미화) 답습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보건데 그녀를 단순히 나치 시대의 희생양으로 주장해서 그녀가 만든 작품들에 그것이 가진 것보다  더욱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그만두어야한다는 평론을 읽고 나서이다. 그리고 수전 손택의 평론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해석을 반대한다>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내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이 책의 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 비평서를 접한 것은 나의 지적 허세를 위한 밑거름정도였는데, 그렇게 접한 책 한 권 때문에 삼십년 넘게 지켜오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나 역시도 책을 읽으면 글자보다 소위 말하는 행간에 더 큰 의미들이 부여되어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리고 이 행간이란 것들은 언제나 내게 유리하게 해석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영역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부정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영역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좋은 쪽으로 해석했고, 그것을 주변에 강요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다녔는데, 거기에는 ‘나는 옳은 일은 하고 있으니까’라는 교만이 깔려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전 손택의 평론집을 읽고 나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던 행간은 사실 글자와 글자 사이의 빈 공간일 뿐이었고, 내가 진짜 보아야 할 곳은 비어있는 행간이 아니라 글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게 된 후 내게 세상은 행간이 지배하는 상당히 무서운 곳이 되었다.

 많은 약자들이 오늘도 길거리로 나와서 싸우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일수도, 여성일수도, 성소수자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일 길거리에서 어떤 요구를 하며 싸우는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싸움의 대상과 주체는 항상 변화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대상과 주체만큼 다양하지 않다. 그것은 그 싸움을 바라보는 눈에 이미 해석이라는 필터가 씌어져 있고, 이 해석이라는 필터는 의외로 다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자보나 유인물에 적혀 있는 글자에는 큰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여기서 데모를 너무 자주해서 땅값이 떨어지거나(나는 노동청 앞에서 집회를 하다가 정말로 이런 항의를 받아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대통령에게 해가 가거나, 혹은 그냥 데모하는 꼴이 보기 싫거나, 더 나아가 그냥 북한이 싫거나 라는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글자보다 존재하지 않는 행간을 해석해 이들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위해 집회를 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님에도, 비슷하게 예술가가 자신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담는 것은 잘못이 아님에도, 모두 상당히 고차원적이고 수준 높은 혹은 의례히 그래야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수전 손택은 예술가를 가장 깊은 단계의 고통을 발견한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킬 직업적 수단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에 수난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술가들은 자신의 수난을 정면으로 바라봐야하고 그것을 어떻게 뛰어난 직업활동의 결과물로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며 이 때문에 필히 쇠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이들에게 해석이라는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로기 상태에 빠진 복서를 난도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도 나타난다. 해석이라는 폭력의 잣대는 약자들에게 유난히도 가혹하다.
 
 최근 일어난 미투운동에서 나는 이런 일들을 확실하게 목격하고 있다. 가해자일지도 모를 사람들의 인권에는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 사람들이 피해자일지도 모를 사람이 받는 2차피해에는 둔감하다. 내 생각에 그들은 단지 해석의 여지가 더 풍부한(그리고 반격의 여지가 훨씬 적은) 피해자들을 향해 이유 없는 복수와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이제는 “아니 그럼 왜 따라간 거야?”라는 이야기에는 이제 지쳐서 쉽사리 반박할 수도 없다. 자기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의 말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에는 그건 핑계일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예술가들을 핍박하던 해석은 우리 생활에 들어와 다양한 형태의 복수가 되어있다.

 결론적으로 수전 손택은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거나,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현상을 목도하면 예전과 달리 나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려고 노력한다. ‘이면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 같은 행동은 때려치워버렸다. 왜냐하면 수전 손택이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편지구절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란 말이요.”처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거기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책 속의 길] 133
윤상민 / 대구에서 월급쟁이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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