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귀한 시대가 그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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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칼럼] 권력의 통제 속에 언론의 진정성을 그리던 시대, 지금은?


 예전에는 동기회에 나가면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동기들이 묻는 게 많았다. 사회부기자인 나에게 궁금한 건 정치 건 뭐 건 물어왔다. 나보다 세상을 많이 아는 동기들도 많지만 그래도 현장을 누비는 기자가 생생한 뉴스를 많이 알 것으로 판단한 듯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나는 동기회가 있는 날이면 습관처럼 세상을 챙겨 나가게 되었다."봐라 그 말이 맞잖나!" 언론은 불신해도 나는 불신하지 않는 듯했다.

 그때 언론의 자유는 꿈이었다. 국가억압기구는 한 줄의 저항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언론 또한 이념기구에 충실했다. 자가통제가 몸에 배어 탈출하지 못했다. 정권유지에 위배되는 것들은 - 학생시위, 노동쟁의, 우방인 미국 또는 미군에 관한 부정적 시각 등 - 일어나더라도 싣지 못한다는 사실은 기자들을 우울하게 했다. 신문에 "독재정권!"이라는 기사 한 줄 써보면 여한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기자들은 그래서 막걸리집으로 서둘러 갔다. 혹 존경받는 언론인은 보이지 않는 행간에다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쓰는 식이다. 독자들은 그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으면서 숨을 쉬었다. 억압기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지만, 통치권자도 '숨구멍'에 대해서는 관대한 듯 했다.  
 동기회에는 뉴스가 없는 동기들이 모여들었고, 동기들은 신문에 실리지 않는 불령(不逞)뉴스를 듣고 싶어 했다. 뉴스가 귀한 시대였다. 30~40년 전의 풍경이다.

사진 출처. YTN [人터view] '민주화 과정 속 언론, 기레기의 역사'(2019-06-22) 방송 캡처
사진 출처. YTN [人터view] '민주화 과정 속 언론, 기레기의 역사'(2019-06-22) 방송 캡처

 근래에는 바쁜 일들이 많아서 자주 동기회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나가더라도 예전처럼 내한테 묻는 게 거의 없다. 동기들이 천지 모르는 게 없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는 처지가 됐다. 어디에서 그런 자신감까지 부여받았는지 저마다 확신에 차 있다. '자신의 말'에 대해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함마저 보인다. 뭔가 확실하게 믿는 구석이 있는 듯 했다. 과거의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싶다. 그때는 이론도 없었지만 동기들은 나를 찾았고 지금은 언론학도로서의 이론도 있는데도 아무도 찾지 않는 꼴이다!  

 동기들 간에 오가는 확신에 찬 뉴스들에 대해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 뉴스들이 어떤 뉴스인지 안다. 생산자의 부류도 안다. 어떤 유통구조인지 안다. ... 안다! 그러나 동기들에게 입력된 뉴스정보가 너무 확고하여서 그것을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무엇부터 말해야 하나? 문제의 핵심을 먼저 말해야 하나? 수용이 가능할까? 동기들이 확신하는 뉴스(정보)에 대해, 그 뉴스의 근원, 생성이유, 의도성, 뉴스의 요건 충족도, 파급효과를 어떻게 다 얘기하랴. 그래서 "고만 해라"는 따위로 화제를 바꾸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유튜브를 통해 전파되는 이 같은 뉴스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주무기로 삼는다.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보는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를 부정한다. 소위 오랜 전통의 신문방송은 일제와 독재권력에 매신(賣身)한 과거사를 이제까지 한 번도 반성 성찰 속죄한 바 없으므로 부정이나 매도를 당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좌파언론'이라는 프레임은 매도의 타당한 이유가 못된다.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논증의 오류도 범하게 된다. 그런데도 어디 할 것 없이 '좌파'라는 60년대 매카시즘을 도포(塗布)한다. 

 이같은 뉴스의 특성은 뉴스의 요건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수습과정을 거친 기자라면 다 아는
바, 뉴스는 뉴스의 출처가 분명해야 하고, 취재원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의도성 또는 고의성이 없어야 하고, 수혜자가 불특정 독자 또는 시청자여야 하며 특정인 특정계층이 수혜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점. 그래서 뉴스는 보편성 객관성 공정성 중립성 불편부당성의 덕목을 지녀야 한다는 점. 그런데 이같은 맥락의 뉴스는 그렇지가 못하다. 불량품이다. 우리는 책을 고를 때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보고 믿을 만해야 주문한다. 뉴스도 그렇게 해야 마땅한 일이다.  

 나는 뉴스불량품이 양산되고 이 불량품을 환호하는 이 세상의 책임은 기존 언론에게 있다고 본다. 나는 언론은 언론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자인 나는 불량품인가 아닌가. 내가 생산하는 뉴스는 불량품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불량품이 나돌도록 무엇을 하였나. 끊임없이 반추하고 반추해야 한다. 

 전직 서울의 모 신문 편집국장 출신 모 정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최근 살포한 보도자료로 지역언론 대다수가 액면 그대로 기사화하는 것을 보고 나는 지역언론이 놀아나는 것 같아 비참함을 느꼈다. 그 의원은 예산통과를 놓고 "만행을 저질렀다" "도둑질했다" 등의 악의적인 언사를 사용했다. 그 의원은 의도한 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기자다. 따옴표로 처리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기자는 그 의원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고 기자 본분대로 원재료를 분석하고 비교하며 균형감 있는 기사를 생산해야 할 게 아닌가. 더 나아가자면 그 의원은 어떤 기자였는지, 어떤 편집국장이었는지, 후배들에게는 어떤 선배였는지, 비례대표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본적으로 점검해 보았는가.

 'R'이라고 이니셜을 달 수 있는 한 정치인이 무엇을 알리겠다고 일인방송을 개설했다. 이내 유명언론인이 되었다. 그 정치인이 자칭 본인이 "취재를 하는 언론인'이라고 하루아침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해도 수십년 경력의 기자들 아무도 그를 조금도 비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수습과정도 거치지 않은 'R'은 언론인 반열에 스스로 탑승하여 오랜 경력의 기자들을 희롱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라고 자칭할 때의 애교와는 다르지 않는가. 그 정치인이 기자의 고뇌를 알겠는가. 언론의 책임의 깊이를 알겠는가. 뉴스의 무서움을 알겠는가. 미디어문장론, 취재방법론 등은 읽어보았을지 모른다. '과일주 담그는 법' 정도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R'뿐이랴. 천지가 언론이고 언론인이다. 언론은 이제 아무나 하는 호락호락한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 중에는 언론정도를 지키려는 훌륭한 언론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사실을 포장한 사실스러움(truthiness)의 뉴스, 내 맘을 위무하며 아부하는 뉴스, 설령 뉴스의 요건을 결한 불량품이더라고 그런 뉴스는 확신에 찬 연대를 형성하게 되고, 누구에게는 수익원이 되고, 이에 편향된 소비자는 전도사처럼 '참을 수 없는 복음'을 전파하게 되고, 점점 뉴스집단은 확장하게 된다. 기자들이 '그렇게' 하는 사이에!

 그 시대! 그 시대가 그리운 것은 통제 속의 그 시대가 언론의 진정성을 그리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뉴스는 진실을 추구하는 뉴스라는 믿음을 가졌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몰락의 길은 보인다. 몰락은 자충(自充)이다. 새해가 와도 몰락의 길로 가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더 얘기할 수 있으랴.







[유영철 칼럼 20]
유영철(兪英哲) / 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언론정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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