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학교에서 경찰에 의해 뽑혀 나갔던 '인혁당 추모비'가 30년 만에 다시 세워진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 희생자 8명 중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열사는 경북 경산시에 있는 영남대 출신이다. 지난 1995년 인혁당 사건 20주기를 맞아, 대학 후배들은 박정희 독재에 맞선 선배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민주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캠퍼스에 추모비를 세웠다.
하지만 경찰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학내에 들어와 추모비를 강제 철거했다.
다시 30년이 흘러 인혁당 사건은 올해 50주기를 맞았다. 영남대 동문들은 추모비가 철거됐던 그 자리에 다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운다.
영남대학교 민주동문회 등이 참여하는 '4.9통일열사 50주기 영남대 행사위원회'는 오는 29일 오후 영남대 종합강의동 앞 통일동산에서 '4.9통일열사 50주기 영남대 추모문화제'를 열고, 인혁당 희생자 50주기 추모비를 설치한다고 20일 밝혔다.
추모비는 가로 69cm, 높이 45cm의 작은 크기다. 비석 앞면에는 영남대 출신 인혁당 희생자 도예종·서도원·송상진의 이름이, 뒷면에는 이들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하자는 내용의 글귀가 실릴 예정이다.
1994년 4.8 학생총회에서 이듬해 인혁당 20주기를 맞아 희생자 3명이 발생한 영남대에서도 추모비를 건립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당시 영남대 총학생회와 영남대 민주동문회가 1,500만원~2,000만원 정도의 돈을 모아 1995년 4월 9일 영남대 종합강의동 앞에서 제막식을 열고 높이 2m가 넘는 비석을 세웠다.
하지만 20일여 뒤인 5월 11일 새벽 3시경 경찰은 포크레인과 페퍼포그 등을 앞세워 추모비를 강제 철거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경찰의 학내 진입을 학교가 묵인했다는 이유로 총장실을 점거하고, 경산 중방동 중앙파출소에 찾아가 화염병을 던져 파출소 일부를 불태우기도 했다.
추모비가 뽑힌 자리에는 비석 하단부와 보도블록만 남았으나 대학 본부 측에서 이마저도 모두 철거해버렸다. 때문에 지난해 영남대 민주동문회에서 "50주기 추모비를 세우자"는 의견이 나왔고, 안건이 통과돼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영남대 민주동문회는 1995년 첫 추모비를 세울 당시 대학 본부와 설치 장소 제공에 대해 협의했다는 이유로 재설치와 관련해서는 따로 협의는 하지 않을 방침이다.
안홍태 영남대 민주동문회 부회장은 20일 <평화뉴스>와 통화에서 "영남대는 다른 지역보다 피해자가 많은데도, 30년 전에는 추모비를 침탈당했고, 그 이후로 추모비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다시 추모비를 세워 인혁당 희생자들의 후배로서 넋을 기리고 역사의 아픔, 억울한 죽음을 알릴 수 있는 시작점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예종 열사는 1924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대(현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연맹을 조직하고 한미 경제협정 반대 운동 등을 전개했다. 1961년 1차 인혁당 사건 주모자로 지목돼 징역 3년형을 받았고, 이어 1974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로 구속돼 1년 뒤인 1975년 4월 9일 사형됐다.
서도원 열사는 1923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1950년 매일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했고, 청구대(현 영남대)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1960년 4.19혁명 시기 통일운동 전개 이력으로 재판에서 7년형을 받고 서울교도소에서 2년 7개월간 복역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975년 사형됐다.
송상진 열사는 1928년 경북 달성군 공산면에서 태어나 영남대 전신 대구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연맹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 수사를 받았으며, 이어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1975년 4월 9일 사형됐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작사건'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인 1974년 중앙정보부가 "북한 지령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구성해 국가 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한 이듬해인 1975년 4월 9일 김용원·도예종·서도원·송상진·여정남·우홍선·이수병·하재완 8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한 사건이다. 사형 선고 18시간만에 집행이 이뤄져 국제법학자학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했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인혁당 사건 재조사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법원이 사건 발생 32년만인 2007년 재심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5년 4월 9일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올해로 50주기를 맞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부의 조작으로 인해 8명의 가장과 청년들이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중 4명이 대구경북지역 출신입니다. '평화뉴스'는 당시 사건을 돌아보고 희생자들과 유족들, 관련자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통해 인혁당과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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