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이 '광해'를 미워하는 이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매일>, '영화=사실 재현' 시각 사로잡혀 정치적 덧칠


‘리틀 조선일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매일신문에 영화 관련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2012년 11월 10일).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해 9월 장애인 학교에서 역겹고 끈끈하게 자행된 성폭력 현장을 다뤄 개봉 5일만에 관객 백만을 기록, “영화가 사회를 바꾼” 실례를 보여준 「도가니」때도 없었던 일이다. 「어두운 과거사를 향해 날리는 ‘돌직구’」란 제목을 붙이고「정치영화 봇물」이란 ‘눈’을 달았는데 기사라기보다 ‘주장’이라고 해야 할 만큼 너무나 ‘정치적’이었다. 그만큼 자의성이 강했다.

이 기사가 ‘주장’하는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광해, 왕이 된 남자」(줄여서 「광해」로 부름), 「남영동 1985」, 「MB의 추억」, 「26」은 ‘정치영화’다. 그리고 ‘정치영화’의 재개막을 알린 영화는「광해」란 것이다.

<매일신문> 2012년 11월 10일자 1면
<매일신문> 2012년 11월 10일자 1면

「광해」가 정치영화 선도?

매일신문의 ‘주장’은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국민대중의 정서에 부응, 문화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무차별 국내 개봉에 열악한 자본력을 감독들의 연출, 영상미학, 연기자들이 심혈을 쏟은 창의적인 연기력으로 극복하면서 영화한국의 위상을 세워나가고 있는 국내 영화인들의 노력, 땀의 결실을 한 마디로 ‘정치영화’로 매도하는 점에서 우선 문제가 크다. 국내영화를 보는 전제, 시각이 얼마나 편향돼 있는지 위 ‘주장’을 통해 본다.

영화가 선전․선동 최고 도구?

‘정치와 영화는 불가분의 관계다. 탄생 초기부터 정치적 선전`선동을 위한 최고의 도구로 발전해 온 영화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정치적 기능이 최근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매일신문 11월 10일자 1면 기사 중에서)

영화가 탄생 초기부터 정치적 선전․선동을 위한 최고의 도구로 발전해 왔다는 주장인데 과연 그런가?

영화는 빛과 그림자를 재현하는 데서 출발, 편집을 발견하면서 시공간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이 됐다.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편집)이 연출하는 영화는 태생적으로 표현을 지향했다. 그 표현은 메시지다. 매일신문이 ‘정치영화’라고 하는 일련의 영화들은 영화의 본령에 충실하다. 사실에 기초하지만 사실을 재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학생들이 문화교실로 감상한 「광해」만 봐도 그렇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허구가 개입했다. 그런데 그 허구는 작가의 창조의식이 대중과 만나는 통로이고 사실과 영화 접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영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양한 기법이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특히 감독의 영상의식으로 해석될 때 영화는 생명력을 발휘하고 이 때 관객대중은 감동한다. 「광해」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관객이 감동하면 '정치영화'?

이제 매일신문이 ‘정치영화’라고 주장한 근거를 보자.

먼저 「광해」. 이 영화는 최근 모 영화제를 휩쓴 작품이다. 잘 된 점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건 영화 비평 차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매일신문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그 초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면 분명해진다.

'광해…'는 대선을 앞두고 개봉하면서 관객이 쏠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물론 시나리오가 수년 전에 완성됐기 때문에 올해 대선에 출마한 특정 후보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은 아니라는 게 제작사의 입장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진짜 임금(광해군)을 대신한 광대 하선(이병헌)이 광해군보다 더 백성을 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람객들이 '다음 대통령이 그랬으면…' 하고 기대하는 심리를 이끌어 낸 게 대박의 기반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후보 단일화를 앞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는 이야기도 페이스북에 오르내리면서 화제가 됐다. (매일신문 11월 10일자 1면 기사 중에서)

‘영화 속에서 진짜 임금(광해군)을 대신한 광대 하선(이병헌)이 광해군보다 더 백성을 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람객들이 ‘다음 대통령이 그랬으면…’ 하고 기대하는 심리를 이끌어 낸 게 대박의 기반이었다는 분석이 많다.’는 ‘주장’부터가 일면적이다. 시나리오가 대통령선거와 관계없는 수년 전에 이미 완성됐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가 특정한 정치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란 확실한 증거가 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다음 대통령이 그랬으면…’ 하고 기대하는 심리까지 이끌어 냈다면 그것은 관객에게 내재하는 다양한 문화적 욕구와 시나리오 작가․연기자․감독의 예술혼이 절묘하게 접점을 이룬 결과이다. 그것이 어디 탓할 일인가? 문재인이 봤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구미에 맞는 '역사' 만들기

보수신문의 대명사로 거명되는 조선일보도 「광해」를 탓했다(2012. 9. 29. A31. 여론/독자. 「광해군을 美化해선 안 되는 이유」). 조선일보가 ‘광해군을 美化해선 안 되는 이유’ 도 매일신문과 구도가 거의 동일하다. 우선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자주외교를 펼친 명군이 아니란 것이고, 만일 광해군을 명군으로 꼽는다면 그러면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만고의 역적’이 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운다.

<조선일보> 2012년 9월 29일자 31면(오피니언)
<조선일보> 2012년 9월 29일자 31면(오피니언)

그러면 조선일보가 「광해」를 보는 시각은 어떤가.
조선일보는 영화가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깔고 나름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기위해 조선일보는 우선 역사학계가 쌓아올린 학문적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다. 자주외교를 펼친 명군도 아닐뿐더러 몇 안 되는 반정군을 보고 허겁지겁 도망친 용렬한 군주라는 것이다. 자기 정권도 못 지킨 임금이 무슨 나라를 지켰겠느냐는 해괴한 주장도 편다. 이게 조선일보가 보는 ‘광해군 실상’이다. 그런데 과연 이 땅의 역사학자들 중에서 조선일보의 이 같은 시시콜콜하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조선일보의 구미에 맞는 ‘역사 만들기’)을 ‘역사’라고 인정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영화 「광해」가 서인의 반정이 ‘만고의 역적’임을 선포하기 위해 만들었을까? 광해군의 존재도, 서인의 반정도 지우지 않는 역사(사실)에 기초하되 허구를 끌어들여 펼치는 작가의 창작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점에서 조선일보는 ‘영화=현실의 재현’이어야 한다는 허상을 완고하게 끌어안고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준다. 영화는 창작인데도 말이다.

「광해」의 호소력이 불안한 보수언론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천만관객을 돌파하기 전임에도 「광해」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 관객들(국민)에게 폭발적인 호소력을 지녔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미화해선 안 될 군주’이고, 광해군을 소재로 한 영화는 ‘역사왜곡’이므로 ‘흔쾌한 마음으로 봐줄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속내는 따로 있다. 역사의 재현으로 영화를 보는 조선일보의 시각에서 「광해」는 막강한 정치적 파괴력으로 관객들에게 ‘필이 꽂히는’ 매체이므로 불안했고 위험시한 것이다. 천만관객을 돌파하고도 여전히 관객몰이를 계속하고 있는 「광해」의 관객들이 조선일보의 시각대로 반정군(역시 조선일보 식 사고방식대로라면 박정희의 5.16 군사반란군이 된다)을 편들지 않고 왕이 된 남자 ‘광해’를 편든다면 다가올 대선은 치르나 마나다. 하지만 그건 ‘영화는 영화’란 사실을 모를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치영화' 덧칠하는 이유

「광해」의 초점은 따로 있다. 관객대중의 감정이입을 이끌어낸 탁월한 영화라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광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자본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비판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조선일보나 ‘리틀 조선일보’ 매일신문의 시각은 분명하다. ‘영화=역사의 재현’이란 퇴물 시각에 고정돼 있는 한 사실(역사)을 소재로 한 영화는 위험시되고 그래서 ‘정치영화’로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매일신문의 위 ‘주장’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매일신문은 ‘옛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남영동 대공분실’이라고 했다)이 고 김근태 의원에게 가한 22일 간의 고문기록을 소재로 한 「남영동 1985」나, 이제는 국립묘지까지 조성해 희생자들을 모신 5.18 민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26년」,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를 풍자했다는 「엠비(MB)의 추억」을 죄다 ‘정치영화’로 몰아붙이는 것은 영화가 ‘정치적 선전․선동의 최고의 도구’로 보는 왜곡된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진짜 의도는 보수신문의 지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 대선과 관련해 보수신문에서 유난히 회피하려고 하는 ‘과거사’(평화뉴스 ‘미디어창’ 2012. 10. 30. 「보수언론의 ‘박근혜 감싸기’」 참고)를 이들 영화가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가 혹여 관객들의 뇌리에 ‘과거사’에 대한 비판의식을 심지나 않을까 하는 가당찮은 우려, 바로 정치적 시각 때문이 아닐까?(보수언론, 우리 대구지역에서는 매일신문이 전두환 신군부 정부의 ‘1도1사’란 정치적 방침에 따라 혜택을 누린 유일무이한 신문이란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영화는 빛과 그림자가 연출하는 놀라운 세계를 재현한 영상미에서 출발해 찰나적인 그 영상미를 교차편집이란 기법으로 시간성을 끌어들임으로써 메시지를 표현하는 세계로 치달았고 관객이 가세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역사와 물질이 소통하는 정체성이 뚜렷한 ‘제8예술매체’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그 기간은 영화가 출현하고 불과 20년. 위업이라면 위업이 아닐 수 없는 예술과 기술의 발명품이었다.

'선전ㆍ선동 최고 도구' 독재정부가 선호

 ‘정치적 선전․선동을 위한 최고의 도구로 발전해왔다’는 매일신문의 주장은 나치 독일, 소련, 군국주의 일본 등에서 한 때 반짝했으나 이들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우리 영화인들(연극인들 포함) 일부가 일제강점기 일제의 군국․동화주의 영화 만들기에 앞잡이가 되기는 했으나(자유당 이승만 독재 때나 박정희 군사정부․유신 독재,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정부 때 검열이란 이름으로 자행한 체제 뒷받침 영화 만들기 정책은 물론 정치영화를 목표로 한 독소적 영화․연극정책이었다) 더 많은 영화인들-이를테면 나운규, 이규환, 김유영 등(이들은 모두 대구를 무대로 활동했다)-이 우리 민족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민족문화의 아름다움을 영화에 담으려 노력했고 그 노력이 오늘 영화한국의 밑거름이 된 우리 영화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매일신문의 ‘선전․선동을 위한 최고의 도구란 ’‘주장’은 영화에 대한 극도의 편향성을 보여준다. 또 우리 영화인들에 대한 폄훼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메이저 언론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독자 대중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매일신문은 이제 정치적 색안경을 벗고 영화를 영화로 봐주기 바란다. 관객들은 말한다. “ ‘덧칠’하는 그대들은 정치언론!” “ ‘덧칠’은 이젠 그만!” 하라고.






[평화뉴스 - 미디어 창 209]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