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진보'를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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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칼럼] 다른 생각, 다른 사람을 더 만나지 못한 기억과 성찰


1991년 대학 1학년 시절. 5.18 민주화운동 사진전이 열렸다. 큰 충격을 받았다. 끔찍히 죽임 당한 시체를 처음본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저지른 일이란 것도 그랬다. ‘민주화’를 요구한 시민들을 폭도로 여론조작할 뿐만 아니라 무참히 살해한 그 모든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이런 사실을 몰랐던 나는 학교에 있는 학우들이 이 사진을 보고 진실을 알면 모두 다 나처럼 행동(집회 시위)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앙도서관에 전시된 사진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의 학우들이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도 나와 같은 진실을 보고도 다른 사람들은 나서지 않을까?

똑같은 1학년 시절 4월26일 공권력에 의한 강경대 학생 타살사건을 시작으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른바 91년 5월 투쟁. 학내에는 이런 구호가 붙어 있었다. [시대의 방관자는 죽음의 공범자입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군사독재정권의 이런 폭압과 실정에도 어떻게 진리를 탐구하는 배우는 대학생들이 ‘참여’하지 않는지 속상했다. 집회에 참여한 우리는 ‘정의’였고 ‘역사의 주인’이었으며 참여하지 않은 학우들을 ‘죽음의 공범자’로 낙인찍은 것이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도 ‘정의로운 학생들’의 이런 사고는 오래 갔고 학생운동은 정권의 탄압과 내부의 문제로 인해 힘을 잃어갔다.

Google 폭탄 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Google에서 ‘학살자’를 검색하면 전두환이 가장 먼저 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학살자와 전두환이 들어간 웹 페이지(블로그, 카페, 홈페이지 등)를 많이 만들어서 학살자를 검색하면 전두환과 관련된 웹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전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는 전두환이 호화생활을 누리고 경호를 받는 등 ‘광주학살’과 ‘쿠데타’의 주범으로서가 아닌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생활을 누리는 것에 대한 네티즌의 ‘응징’이었다. 검색이 힘인 시대에 ‘학살자 전두환’ 구글 폭탄놀이는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내가 상상해보지 못했던.

91년으로 돌아가보면 시대적 상황에 대해 똑같은 사실과 정보를 인식해도 다른 생각과 다른 판단이 있을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모두 다 똑 같을 수 있겠는가? 자라온 환경, 현재의 처지, 추구하는 가치관 등에 따라 다른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의 모습을 돌아보면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은 것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이다. 만나서 대화하고 토론하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끼리에 편안해했고 익숙했다.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의 집회에 함께하지 않은 많은 학우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찾아가고 대화하는 노력보다 ‘전대협’의 방침대로 결정된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과정에 정치적 결정과 행동에 대해 우리가 스스로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심각히 반성을 한 것은 없었다. 우리는 모두 옳았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했다.

딸 아이가 갓난 아이일 때 살던 동네에서 한 엄마가 아이에게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대 여섯살 난 아이가 무어 그래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교양없이 동네 사람 다 보는 데서 목소리를 높여야 할까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딸에게는 ‘그러지 말아야지’ 작은 다짐을 하면서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딸 아이가 비슷한 또래가 되고 나 또한 예전의 그 아주머니와 비슷한 모습이었던 적이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예전의 나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학생운동과 사회단체 활동을 20년 이상 경험하면서 ‘사람’의 소중함과 ‘교육’의 참 가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인 앞에 평등하고 존엄한 인간을 위하고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을 위한 집회에 수도 없이 다니면서 되뇌이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딸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사랑하고 존중하며 꽃으로도 때리지 않을 것이며 공부에 대한 압박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판판이 깨져나갔다. 잠깐이나마 때론 밉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며 누가 꽃으로 때리지 말라는 말을 만들었는지 따지고 싶기도 했다. 머리 속에 있던 육아와 교육에 대한 가치들이 구체적 생활에서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하며 누구라도 볼까 부끄럽고 화끈거린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머리속에 있는 지식은 남에게 설명할 때 그 정도를 알게 되고,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나게 된다. 언행일치 지행합일의 경지를 바라지는 않았더라도 딸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자괴감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되돌아보게 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일치시키고, 추구하는 가치대로 일상을 살아가는 위한 치열한 과정이 진정한 배움과 성찰의 과정일 것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두 다 공동체의 가치를 체화하고 있지는 않다. 저마다의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부족한 존재들이다. 가끔씩 이런 소리를 듣는다. “어떻게 시민단체 일하는 사람들이 상근자들에게 최저임금도 보장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 아직도 어딘가에 최저임금도 받지 않고 일하는 상근자들이 존재하고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기자회견을 가지고 성명에 단체 이름을 연명하면서도 정작 자기 단체의 상근자에게 규정된 최저임금을 주지 못하는 이 언행불일치는 어찌해야 할 것인 것?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의 이런 식의 불일치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자기 삶에 비추어보고 고쳐나가는 과정이 기본으로 자리잡아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가 다가 오고 있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도 저 마다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애틋한 마음에 짠하면서도 또 한편은 미래를 생각하니 복잡한 마음이 든다. 길게 멀리보고 준비하자는 말이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니었으나 긴 안목을 가지고 희망을 내다보기에 진보의 상황이 녹녹치 않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다시 기본에 집중하지 않고 어디서 시작할 수 있을까, 진보적 의제와 가치들의 확산을 위해서는 그 내용과 방식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도 길게 남은 진보의 겨울에서 하나의 소중한 새싹을 키우기에 다시 돌아보는 오늘이다.





[오택진 칼럼] 20
오택진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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