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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만의 인혁당 무죄 확정, 대구 정신은 살아날 것인가
정중규 / 진보적 변혁의 도시였던 대구, 시대정신을 되찾게 되기를
2015년 06월 10일 (수) 09:27:04 평화뉴스 pnnews@pn.or.kr

지난 5월 15일 대구경북디자인센터 아트홀에서는 <변혁의 도시 대구, 대구 발(發) 시대정신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대구 정신의 원형을 상상해보는 대구사회연구소 심포지엄이 있었다. 현대 대구의 시대정신으로 일컬어지는 일제시대의 국채보상운동과 4.19혁명의 전초였던 2.28운동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지방분권운동에 대한 주제 발제와 패널토론이 이어졌다. 

   
▲ "대구 정신의 원형을 찾아라!" 지난 5월 15일 대구경북디자인센터 아트홀에서 <변혁의 도시 대구, 대구 발(發) 시대정신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열린 대구사회연구소 심포지엄. ⓒ 정중규
 
사실 대구는 해방 후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진보적 도시였다. 물론 1946년 미군정이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국민 중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지만, 특히 대구는 1946년 10월항쟁에서 드러나듯 체제저항적인 반골 기질이 두드러졌던 고장이었다.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두 달 뒤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혁명의 전초였던 2.28민주항쟁은 또 어떠한가. 2.28 대구가 없었으면 3.15 마산이 없었고 3.15 마산이 없었으면 4.19도 없었다. 그처럼 대구는 진보의 메카요 민주주의의 성지였다. 그런 대구가 지금은 보수의 본산이 되었다. 심지어 2.28시위에 앞장섰던 경북고 출신들이 박정희 정권 시절 장기집권을 뒷받침했던 정관계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대구가 박정희에게 미쳤던 영향, 박정희가 대구에 미쳤던 영향

그런데 대구의 이런 이념적 변화가 인간 박정희의 개인적 족적과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 박정희는 이념적 궤적으로 살펴볼 때 극좌에서 극우까지 오고간 대단히 모순적인 야누스적 인간이었다. 집안 자체는 부친이 동학혁명에 가담했고, 큰형 박동희가 월북, 박상희는 대구항쟁 때 구미지역 지도자로 활약하다 진압 과정에서 피살당하는 등 대단히 반체제적이었다.

박정희 개인도 끊임없이 반골적인 행태를 보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나 1960년 3.15부정 선거 직전에도 쿠데타를 모의했으며, 군 내부에서도 정군(整軍)운동을 내세운 하극상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다 끝내 1961년 5.16쿠데타를 성사시킨다.

그 전에 만주군관학교 출신 황군장교로 해방을 맞은 박정희는 1946년 박상희의 죽음과 함께 남로당에 가입해 남로당군사총책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1948년 여수사건 후 좌익분자 색출 과정에서 체포되자 군대 내부의 남로당 조직을 밀고해 목숨을 건지는데, 대통령이 된 후 그가 유독 좌익 사범을 혹독하게 다룬 것은 이런 레드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를 세탁해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극단적으로 흘러갔다. 형 박상희의 친구로 5.16쿠데타 후 북한에서 밀사로 내려온 황태성을 사형시키는 등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 국시도 반공으로 삼았다.

결국 체제저항적인 도시 대구를 체제순응적인 도시로 변화시킨 요인이 개인 박정희라면 그의 생애적 변화와 대구의 현대사적 이념 변화가 겹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도시가 한 인간에 의해 이리 큰 영향을 입을 수도 있는가 싶을 정도로 인간 박정희는 대구라는 도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대구라는 도시가 인간 박정희에 영향을 주었다면, 5.16을 기점으로 인간 박정희가 대구 변화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빵을 위한 싸움에서도 앞장섰던 대구, 경제발전 화두로 그를 제압한 박정희

켄 로치 감독은 영화 ‘빵과 장미(Bread and Roses, 2000)’에서 인간에게는 물질적인 것(빵)과 아울러 인간적 존엄성의 가치(장미)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구는 빵을 위한 싸움에 있어서도 해방 후 첫 번째 민중봉기인 1946년 10월항쟁으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빵을 향한 몸부림에 담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장미꽃에 대한 갈망을 경제발전 화두로 돌리며 눌렀고, 결국 대구가 거기에 호응하면서 일단 빵을 위한 싸움에선 외형적으론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다.

   
▲ "우리는 빵과 함께 장미도 원한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Bread and Roses, 2000) 장면 갈무리. ⓒ 정중규

대구의 보수화 그 변곡점이었다. 인간다움보다는 우선은 먹고 사는 것에 피땀을 쏟으면서 대구는 박정희의 길을 따라갔다. 대구는 마치 조공하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산업화 주역으로 인력공급지역으로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 수십 년 각고의 노력 성과물이 지금의 우리 사회의 기득권 집결지로 물신의 바벨탑인 강남이다. 강남지역민 다수가 대구경북 출신이듯, 강남이라는 숙주를 탄생시킴으로써 대구는 자신의 혼을 잃고 어느덧 중앙만 바라보는 서울바라기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물신에 눈먼 대구는 박정희 장기집권 특히 유신독재까지 옹호하며 자신을 바쳤으며, 장기집권의 토대인 영호남 지역감정의 본산이 되기도 하였으니, 그 발언의 원조 이효상은 대구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대구의 기백을 죽인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용공조작 사건

경제발전이라는 화두가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를 끌어들이려 내민 당근이라면 지난 5월 31일 대법원에서 반세기만에 무죄 확정된 두 차례 인혁당 사건은 채찍이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엮인 자들 가운데 도예종 송상진 여정남 씨 등 대구경북 출신들이 많은 것에서 보듯 대구의 기백을 결과적으로 꺾으려 박정희 정권이 만든 용공조작사건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기습 공격으로 대구의 정신은 결국 꺾여버렸다. 특히 2차 공격은 1차 공격으로도 꺾이지 않는 대구 주류 양심 세력에 대해 극단적이고 충격적인 방법(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쓴 확인 사살이었다.

   
▲ 대구지역 반독재 세력에 대한 확인사살인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을 보도한 1974년 5월 27일자 경향신문 1면.

그렇게 꺾여버린 대구는 박정희 신화의 신도가 되어갔고, 그의 깃발만 꽂으면 막대기도 당선된다는 몰이성적 지역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렇게 형성된 대구의 정치적 단일 지배 구조는 지역사회를 경직시키는 가장 근본 원인이 되었다. 대구의 정치ㆍ행정 권력이 단일 정당에 의해 장악되면서 시민사회의 정치?행정 권력에 대한 견제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창조성과 시민적 생명력을 죽이는 경직성은 경제적 침체까지 가져와 대구는 16개시도 중 지역총생산(GRDP)이 꼴찌를 달릴 만큼 지역경제도 바닥을 치고 있다. 청년이 탈출하는 도시 대구, 대구에 남게 되는 것을 루저처럼 생각하는 열패주의에 젖은 도시, 진보의 옛 꿈을 되돌아보기엔 상흔이 너무 깊고 보수적 지역정서를 자랑하기엔 스스로도 부끄러운 자아분열 상태, 그것이 박정희 유산의 현주소다.

박정희로 인한 대구의 이념적 자아분열, 인간다운 복지도시 실현으로 통합시켜야

극좌와 극우 사이를 오간 박정희 개인 안에 있는 모순된 이념적 자아분열에 통합이 필요하듯이, 박정희와 함께 하면서 겪게 된 대구 역시 이런 극단적 자아분열 상태에 대한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해방 후 비극적 이념 대결 사건들, 1946년 10월항쟁이나 두 차례에 걸친 인혁당 사건들에 대해 오로지 사실에만 입각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4.3제주항쟁이 그러하듯 역사적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는 직면할 때 일어난다. 이제 대구의 아픔을 직면하고 그 근본적인 치유에 나설 때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치유는 빵을 위한 싸움에서 장미를 위한 싸움으로 나섬으로써 이뤄질 것이다. 알고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싸움도 아니다. 10월항쟁과 2.28운동, 특히 1970년대 가난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박정희의 대척점에 섰던 대구 청년 전태일에 닿아 있다. 1912년 로렌스시에서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 “우리는 빵과 함께 장미도 원한다”고 외쳤듯이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일요일은 쉬게 해 달라!”며 노동자의 인간존엄을 외치며 분신했다. 박정희는 수많은 전태일을 희생시키며 외형적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사회의 바탕을 닦아놓고 말았다. 전태일의 요구가 지금도 정당하고 유효한 까닭이다.

전태일 정신과 박정희 정신은 2012년 대선의 화두이기도 했던 ‘경제민주화를 통한 복지사회’ 실현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빵을 얻기 위한 산업화 과정에 기여한 그만큼 이제 대구와 대구시민은 장미꽃을 피우기 위한 복지사회 실현에 앞장 서야 한다. 그를 통해 박정희와의 유착관계로 물신에 찌들었던 대구 지역 정서를 극복하고, 오랜 시간 동면에 들어갔던 고결한 기백을 다시금 되찾으며 대구를 인간다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기고]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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