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 할매가 문 대통령에게 "사드, 새해에는 꼭 치워주이소"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 입력 2017.12.3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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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남(87) 할머니, 사드 상처 여전한 그 곳에서..."평화로운 고향, 눈비 맞으며 아직도 촛불 들고 있습니다"


"할머니, 문재인 대통령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기자)" / "와 없노(왜 없어). 있지"

굽은 등 주름 진 손. 88세를 앞둔 '소성리 터주대감' 임 할매가 사드를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맑은 액체가 목으로 넘어갈 때만큼은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는 이름도 외우기 힘든 그 무기를 잊을 수 있었다. 김치 한 조각을 우물우물 씹는 임 할머니 옆에 다른 할머니들도 '짠'하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그놈의 사드'에 고통받았던 한 해를 털어냈다. 

"내가 소성리 할매들 중 세 번째로 나이 많다. 나도 길에서 이래(이렇게) 싸운다. 늙은이가 대단한 걸 할 수 있나. 자리 지키는게 다지. 그저 고향 지키고, 자슥(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니까 이래 나오지"

임길남(87) 할머니(2017.12.30.성주 초전면 소성리)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임길남(87) 할머니(2017.12.30.성주 초전면 소성리)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할매'는 사드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회관 앞 사드 반대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맨 앞자리에 앉는다. 굽은 등 때문에 다른 할머니들처럼 타 지역 집회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동네에서 열리는 집회에는 빠지지 않고 꼬박 참석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30일 오후 4시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148-1번지. 올해 전국에서 그 어떤 곳보다 뜨거운 열기가 모인 소성리 마을회관. 2018년도 새해를 이틀 앞둔 이날 소성리부녀회가 '송싸(드)영신('送싸迎新.사드를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다)' 촛불집회 전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기에 임 할머니도 다른 할머니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사드 반입 당시 진압으로 부서진 천막 잔해가 할머니 집 앞에 있다(2017.12.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사드 반입 당시 진압으로 부서진 천막 잔해가 할머니 집 앞에 있다(2017.12.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임길남(87) 할머니는 마을회관 건너편 작은 집에 혼자 살고 있다. 분홍색 페인트칠이 된 할머니 집 외벽에는 'NO THAAD(사드 반대)', '삶의 터전 건들지 마라'라는 글귀와 함께 촛불을 든 주민들의 모습과 예쁜 꽃 그림도 그려져 있다. 대문 옆에는 '평화' 현수막도 걸렸다.

집 앞 풍경은 딴판이다. 9월 사드 장비 추가 반입 당시 경찰병력 8천여명 진압에 부서진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날의 상흔이 집 앞 곳곳에 여전하다. 1953년 결혼 이후 64년간 소성리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는 20년 전 남편을 잃고 이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평온하던 산골마을, 작은 시골집은 사드가 들어오면서부터 전쟁터가 됐다. 할머니는 매일 이 광경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는 올해 4월 26일과 9월 7일을 여전히 기억한다. 저항하는 주민들을 밀어내고 사드가 마을을 지나갔던 그 날. 할머니는 처음 마주하는 국가 폭력 앞에 망연자실했다. 성주읍내에서 소성리로 시집와 70년 가까이 살았지만 이보다 처참한 광경은 없었다. 가끔 그날이 꿈에 나오기도 한다.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서 나가봤더니 경찰들이 집 앞에 둘러싸고 있어서 한 발자국도 못나가게 했다. 우리 같은 늙은 할매들이 무슨 힘이 있나. 그냥 새벽까지 잠도 못자고 사드가 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다. 젊은 사람들은 다치고 울고 하는데 참 서럽더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 나누는 소성리 할머니들(2017.12.30)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 나누는 소성리 할머니들(2017.12.30)
 
 
할머니 회상에 다른 할머니들도 끼어들었다. 장경순(84) 할머니는 "그날(사드 들어온 날) 아직도 생생하다. 비는 내리는데 경찰은 여기 저기서 들이닥치지. 마구 서러워 눈물만 났다"고 말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소성리 주민 중 막내격인 도경임(78) 할머니도 "올 한해는 사드로 시작해 사드로 끝났다. 사이렌 소리에 벌떡 일어나 마을회관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밤새 사드가 들어오는 것을 막다가 경찰에 들려나가기도 했다"며 "내년에는 사드가 나간다는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년 소원을 빌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문재인 대통령을 향했다. 보수적 정치성향을 지녔던 소성리 주민들은 사드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껴 올해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뽑았다. 사드 재검토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도 사드는 여전히 소성리에 있다. 게다가 추가 배치되기까지 했다. 임 할머니들은 문 대통령을 향한 배신감을 털어놓으며 내년에는 사드가 마을을 떠나길 바랐다. 

"박근혜 그기(그 사람이) 잘못 갖다 놓은 사드를 문 대통령은 제대로 치울줄 알았다. 헌데 더 갖다 놓을줄 누가 알았나. 함께 촛불을 들었던 대통령이라 가장 믿을만해서 찍었는데 기가 찰 노릇이다"

사드를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송사영신' 올해 마지막 촛불(2017.12.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사드를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송사영신' 올해 마지막 촛불(2017.12.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올해 마지막 사드 반대 촛불집회에 주민,연대자 3백여명이 참석했다(2017.12.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올해 마지막 사드 반대 촛불집회에 주민,연대자 3백여명이 참석했다(2017.12.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그러면서 할머니는 문재인 대통령을 '촛불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다시 한 번 '결단'을 촉구했다.

"촛불로 당선된 대통령님 아입니꺼. 지금 소성리는 팔십 먹는 노인네들이 사드 막을거라고 추운날 눈비 맞으면서 아직도 촛불 들고 있습니더. 자식 키우면서 칠십 년 가까이를 여(기)서 살았는데 사드로 평화로운 고향을 잃을 수 없습니더. 내년에는 꼭 들고가주소. 촛불 대통령이 사드 치워주이소"

할머니들은 음식을 넉넉히 먹고 나서 오후 6시부터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열린 올해 마지막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이날 집회에는 주민과 연대자 등 3백여명이 참석했으며 1시간30분가량 진행됐다. 이들은 오는 2018년에도 사드 철회 운동을 이어갈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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