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문재인 대통령에게 하실 말씀 없으세요(기자)" / "와 없노(왜 없어). 있지"
굽은 등 주름 진 손. 88세를 앞둔 '소성리 터주대감' 임 할매가 사드를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맑은 액체가 목으로 넘어갈 때만큼은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라는 이름도 외우기 힘든 그 무기를 잊을 수 있었다. 김치 한 조각을 우물우물 씹는 임 할머니 옆에 다른 할머니들도 '짠'하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그놈의 사드'에 고통받았던 한 해를 털어냈다.
"내가 소성리 할매들 중 세 번째로 나이 많다. 나도 길에서 이래(이렇게) 싸운다. 늙은이가 대단한 걸 할 수 있나. 자리 지키는게 다지. 그저 고향 지키고, 자슥(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니까 이래 나오지"
'할매'는 사드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회관 앞 사드 반대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지팡이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맨 앞자리에 앉는다. 굽은 등 때문에 다른 할머니들처럼 타 지역 집회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동네에서 열리는 집회에는 빠지지 않고 꼬박 참석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30일 오후 4시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148-1번지. 올해 전국에서 그 어떤 곳보다 뜨거운 열기가 모인 소성리 마을회관. 2018년도 새해를 이틀 앞둔 이날 소성리부녀회가 '송싸(드)영신('送싸迎新.사드를 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다)' 촛불집회 전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기에 임 할머니도 다른 할머니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임길남(87) 할머니는 마을회관 건너편 작은 집에 혼자 살고 있다. 분홍색 페인트칠이 된 할머니 집 외벽에는 'NO THAAD(사드 반대)', '삶의 터전 건들지 마라'라는 글귀와 함께 촛불을 든 주민들의 모습과 예쁜 꽃 그림도 그려져 있다. 대문 옆에는 '평화' 현수막도 걸렸다.
집 앞 풍경은 딴판이다. 9월 사드 장비 추가 반입 당시 경찰병력 8천여명 진압에 부서진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그날의 상흔이 집 앞 곳곳에 여전하다. 1953년 결혼 이후 64년간 소성리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는 20년 전 남편을 잃고 이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평온하던 산골마을, 작은 시골집은 사드가 들어오면서부터 전쟁터가 됐다. 할머니는 매일 이 광경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는 올해 4월 26일과 9월 7일을 여전히 기억한다. 저항하는 주민들을 밀어내고 사드가 마을을 지나갔던 그 날. 할머니는 처음 마주하는 국가 폭력 앞에 망연자실했다. 성주읍내에서 소성리로 시집와 70년 가까이 살았지만 이보다 처참한 광경은 없었다. 가끔 그날이 꿈에 나오기도 한다.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서 나가봤더니 경찰들이 집 앞에 둘러싸고 있어서 한 발자국도 못나가게 했다. 우리 같은 늙은 할매들이 무슨 힘이 있나. 그냥 새벽까지 잠도 못자고 사드가 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다. 젊은 사람들은 다치고 울고 하는데 참 서럽더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문재인 대통령을 향했다. 보수적 정치성향을 지녔던 소성리 주민들은 사드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껴 올해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뽑았다. 사드 재검토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도 사드는 여전히 소성리에 있다. 게다가 추가 배치되기까지 했다. 임 할머니들은 문 대통령을 향한 배신감을 털어놓으며 내년에는 사드가 마을을 떠나길 바랐다.
"박근혜 그기(그 사람이) 잘못 갖다 놓은 사드를 문 대통령은 제대로 치울줄 알았다. 헌데 더 갖다 놓을줄 누가 알았나. 함께 촛불을 들었던 대통령이라 가장 믿을만해서 찍었는데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문재인 대통령을 '촛불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다시 한 번 '결단'을 촉구했다.
"촛불로 당선된 대통령님 아입니꺼. 지금 소성리는 팔십 먹는 노인네들이 사드 막을거라고 추운날 눈비 맞으면서 아직도 촛불 들고 있습니더. 자식 키우면서 칠십 년 가까이를 여(기)서 살았는데 사드로 평화로운 고향을 잃을 수 없습니더. 내년에는 꼭 들고가주소. 촛불 대통령이 사드 치워주이소"
할머니들은 음식을 넉넉히 먹고 나서 오후 6시부터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열린 올해 마지막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이날 집회에는 주민과 연대자 등 3백여명이 참석했으며 1시간30분가량 진행됐다. 이들은 오는 2018년에도 사드 철회 운동을 이어갈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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