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4월 17일, 대구 중구 삼덕동 102번지.
# 일제 폭압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고 끝내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이 남은 '대구형무소'가 세워졌다. 근대 감옥으로 지어진 형무소는 3,991평(구내 면적 3,099평, 구외 면적 892평)의 크기로 조성됐다. 감옥 면적만 312평에 달했다. 개소 후 수차례 증축을 통해 7,800여평으로 확장됐다.
대구형무소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평양형무소와 함께 일제강점기 전국 3대 형무소로 불렸다.
대구형무소의 전신이자 중구 포정동에 있었던 '대구감옥' 개소 당시 수감자는 174명에 불과했으나, 삼덕동으로 확장 이전한 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5,000여명이 수감되기도 했다.
특히 삼남(영남·호남·충청) 지방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거나 사형당했다.
수인번호 '264'를 필명으로 사용했던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1904~1944) 선생이 대구형무소에 수감됐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장진홍(1895~1930) 선생과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1884~1921) 의사, 항일 무장단체 의열단을 설립한 이종암(1896~1930) 선생은 이곳에서 순국했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만 216명. 일제에 맞선 저항정신이 서린 곳이다.
◆ 일제 강점의 아픔과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남은 그 자리에 대구형무소 역사관이 문을 열었다.
대구 중구청(청장 류규하)은 지난 27일 오후 중구 삼덕동 삼덕교회에서 '대구형무소 역사관 개관식'을 열었다. 역사관은 121㎡(약 36평) 규모로 전시존, 영상존, 추모존 세 구간으로 구성됐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운동가들 이야기와 판결문, 대구형무소 조형도, 대구지역 독립운동사를 다룬 사진과 자료, 패널 등 모두 40여점이 전시됐다.
▲전시존은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삶과 대구형무소의 연혁,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상존에서는 대구형무소 역사·독립운동사 영상을 상영한다. ▲추모존에서는 애국지사들에 대한 감사함을 담을 편지를 작성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역사관 운영 시간은 월요일~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다. 일요일은 휴관한다. 역사관 내에서는 골목문화해설사가 상주하며 해설을 지원한다. 중구청은 역사관을 초·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 교육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역 교육기관에 홍보하고, 현충일과 광복절 등 국가기념일과 연계해 다양한 행사를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 역사관에는 대구지역 독립운동사와 항일단체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겼다.
1919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대구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대구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3월 30일 중구 덕산동 남문밖시장 만세시위 운동, 4월 26일과 28일 동구 미대동 인천 채씨 부락 만세운동에 이어 경북지역까지 전파됐다.
이어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1운동의 확대·발전을 모색했던 '혜성단',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 등 3개의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다 1941년 일본 경찰에 발각돼 300여명이 체포되고 이 중 35명이 구속됐던 '대구사범학교 학생운동',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결성했던 '태극단' 등이 있었다.
류규하 중구청장은 "80년 전 우리 민족은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광복의 기쁨을 누렸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과 고통이 있었다"며 "역사관이 조성된 이곳은 많은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르고 순국하신 대구형무소 사형장이 있던 자리"라고 말했다. 이어 "역사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능진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된 곳이 대구형무소"라며 "하지만 대구형무소는 흔적도 없이 터만 남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비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때문에 "역사관을 잘 활용해 후손들도 기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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