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1일, 한동안 철책 너머로 들리던 대북 확성기 방송이 멈췄다. 북한도 대남 소음 방송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대북방송 중단’ 조치에 대한 첫 호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정전체제 속에 놓여 있다. 대립과 긴장은 일상이 되었고, 평화는 먼 꿈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진실을 알려준다.평화는 이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는 사실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냉전의 고착된 질서에 균열을 내고, 실용 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정신을 계승하되, 급변하는 한반도와 국제 환경에 맞는 새로운 평화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를 ‘신햇볕정책’, 또는 ‘신한반도정책’이라 부른다.이 정책은 단지 남북 평화뿐 아니라, 우리 국민의 삶과 경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는 국가 전략이다.
이재명 정부가 신햇볕정책을 본격 추진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 북미관계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 ‘스타벅스 평양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현재 남북관계의 교착은 북미 관계 경색과 불가분의 관계다.남북의 긴장을 풀 열쇠는 바로 북한과 미국 사이 신뢰 회복에 있다.신햇볕정책은 남북관계 복원의 출발점이자, 북미 정상화의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제안한 ‘스타벅스 평양점’은 단순히 글로벌 브랜드 매장 하나를 여는 것이 아니다. 평양에 미국 자본과 규칙이 들어선다는 건, 북한이 미국과 시장 원칙을 수용하겠다는 신뢰의 표시다. 미국 역시 대북 봉쇄 정책을 대화와 협력으로 바꾸겠다는 강력한 신호가 된다.군사적 긴장 완화만으로 신뢰를 쌓기 어렵기에, 경제와 문화의 연결고리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럽 통합이 석탄과 철강 공동체에서 출발했듯, 한반도 평화도 경제의 상호의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둘째, 통일 개념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 ‘사실상의 통일’이라는 현실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흡수통일이나 연방제 통일 논의는 모두 이상적이지만 현실과는 멀다. 남과 북은 정치·법제도·사회 체계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지향할 통일은 무엇인가? 그 답은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이다.법적 제도적 통일을 뛰어넘어,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고, 무역과 문화교류가 자유로우며, 경제협력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상태를 말한다. 유럽연합 소속 국가들이이 각자 주권국가들이지만 공동체로 기능하는 것처럼, 남북도 ‘공존형 통일 모델’을 실현할 수 있다. 이는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의 재개, 남북 공동 OTT 플랫폼 구축, 인적 교류 활성화 등 구체적 사업으로 점진적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평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지만, 천천히 제도화할 수는 있다.
셋째, 제2의 임동원이 필요하다 — 정책보다 사람이 먼저다.
김대중 정부 햇볕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엔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라는 걸출한 중재자가 있었다. 그는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 모두에게 신뢰받았으며, 한반도 현실과 외교 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이재명 정부에도 바로 그런 ‘피스메이커’가 절실하다. 남북은 물론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의 신뢰를 쌓고 조율할 전문성과 헌신이 필요하다.정책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실행은 사람의 몫이다.평화는 철학이 아니라, 중재의 기술과 신뢰의 축적, 그리고 끈질긴 대화의 산물이다.
‘신햇볕정책’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미래형 국가 전략이다. 분단의 벽은 높아졌고, 한반도는 다시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하지만 우리는 안다. 불가능해 보였던 평화도 결국 가능했다는 것을. 지금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에 이어 네 번째 평화의 도전을 시작할 때다. 이재명 정부가 용기를 내어 평화의 문을 다시 열면, 한반도의 다음 30년은 ‘분단의 관리’가 아닌 ‘공존의 새로운 기회’로 채워질 것이다. ‘신햇볕정책’이 그 첫 번째 열쇠다. 대결과 냉소를 넘어, 실용과 상생의 정치로 나아가자.
[기고] 김두현(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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