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대중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고...” 이렇게 이어진 주례사는 40여 분간 계속되었다. 각오하고 부탁드린 일이지만, 등 뒤 양가 친지들의 표정이 짐작돼 돌아서 있는 이마에는 식은땀이 연신 흘렀다. 안재구 선생이 구국전위 사건 옥살이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0년 2월이었다. 사실 그 때까지 내가 아는 것이라곤 경북대 수학과 교수, 장기수, 남민전, 구국전위 그리고 단과대 선배이자 총학생회장 출신 안영민의 아버지가 전부였다.
남민전 사건 출소 후 경북대 운동권 모임이 초빙한 강연 자리에서 그것도 멀찍이 몇 차례 뵈었을 뿐이었다. 짧지 않은 수배 생활 후 곧바로 결혼하게 된 나는, 잘은 모르지만 그 신념을 새로운 인생의 다짐으로 삼고 싶었다.
그저 전설로만 알았던 안재구 선생의 생애를, 아들이 쓴 책을 통해 한걸음 들어가 들여다보게 되었다. 대충만 알고 있던 이야기, 몰랐던 사실이 너무 많았다는 걸 이번에 비로소 알았다. 마지막 순간의 간병 일기를 모티브 삼아 풀어나간 이야기는 가족사이자 현대사이며, 현대사이자 질긴 고난의 투쟁사 그 자체였다. 역사책으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의 감정선을 따라가기보다 그동안 몰랐던 공백의 페이지를 채우고 정리하는 공부의 시간으로 여겼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그 동안 편견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껏 집안의 특수한 상황과 여건, 환경이 빚어낸 이야기로만, 특별해서 응당한 가족사라고만 여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험한 시절, 시대의 소명이 아무리 높고 고귀한들 숱한 누구는 피해 갔고 누구는 외면했으며 또 외면할 수 있지 않았나. 당연한 서사일리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를 몸으로 체화하고 질기게 살아남은 한 인간의 고뇌와 선택을, 야만으로 점철된 현대사를 사선 넘어 헤쳐온 혁명가의 면모를, 분단이 어떻게 한 인간을, 가족을 질곡으로 몰아넣는가를 이야기는 연이어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는 고난을 통해 비로소 역사적이게 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 말은 긴장과 수난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이 구체적 생애 앞에 그저 사치스럽고 멋드러지고 낭만적인 표현에 불과할지 모른다.
김남주 시인이 안재구 선생을 기려 전사3을 썼다면 몇 구절은 감히 이랬을까
역사의 대하에 마땅히 발 담그기를
눈앞에 펼쳐진 운명과 기어이 마주하기를
전선이란 칼날 위에 서는 것
살얼음 같은 전장, 누구는 앞섰고
누구는 제단의 다음 순번 되리라
허튼 꿈 속조차 놓을 수 없던 혁명가의 다짐
세월 따라 핏줄로 세대로 질기게 전하고 연결한 레포
필생의 수학책 대신 굴곡진 시대를 짊어진 건
딱 떨어지는 논리 따라 척박한 모순의 이치도
술술 풀어지길 바라서였을까
주장 높이고 핏대 세우기보다
후대 세우고 대중의 엄호 높이는 것이 필승의 비기
종국의 진격 위해 당면의 진퇴 그리도 검토했던가
그토록 혁명의 승리 간절했을까
필생의 과제 붙들고 생의 마지막 호흡까지 씨름하다
홀연히 가는 날도 거짓말 같이 시침 맞춘 듯 택일한 듯
숭고한 신념의 크기 무슨 자로 잴 것이며
그 무게 무슨 추로 잴 것인가
운명인 듯 필연인 듯 한뼘도 비껴서지 않았던
그 견고함 화강암인가 금강석인가
두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먼 나라 혁명가와 투쟁사는 경외의 대상도 되고 휴머니즘과 격동이 넘치는 영화의 소재도 되지만 이 땅에선 감히 생각의 족쇄를 풀어헤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의 생애를 온전히 마주할 수 조차 없는 냉엄한 현실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원초의 질문, 나라면 저렇게 살 수 있었을까?
시대를 넘치게 사랑한 인간의 신념은 잠시도 지루할 틈 없는 장엄한 서사를 그려내지만 그게 어디 그저 되는 일인가. 스러져가는 기억 가운데서도 “입에 말아 넣으시오” 무의식의 한가운데 목숨보다 귀한 무언가를 지키고자 했던 본능의 원천은 숙명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미 꼿꼿이 결정되어 왔던 것이다. 감히 넘보기 어려운 영역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저자가 학생운동과 감옥을 정리하고 학원 선생 노릇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같은 단과대 후배라는 이유로 나는 사정 모르고 철없이, 아쉬운 수배 생활비를 얻으러 들이댔다. 그 후 나이 먹어가면서 깨달았다. 살아간다는 건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는 걸. 그냥 살기도 버거운 게 세상살인데 세상과 불화하며 부대껴 산다는 것, 간첩 자식에 부자 간첩에 편견과 배제까지 감수하는 삶이란 오죽했을까.
그렇게 시대의 짐을 승계해 살아내 온 아들의 어깨는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신념과 생활의 무게 사이에는 어떠한 방정식도 함수관계도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한동안 나는 부끄러워 했었다.
저자를 읽고 텍스트를 읽고 내 생각을 읽는다고 독서를 삼독(三讀)이라고 했다던가. 묵직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지금의 나를 들여다보게 하고 일깨우고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자세를 바로잡게 만들어 주었다.
수 많은 가정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했다. 여정남 열사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았다면, 유신의 종말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이 지역의 척박한 여건을 푸념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생각한다. 역사는 사람을 통해 엮이고 엮여 장강을 이루어 흘렀고 많은 이들의 가슴에 이미 홀씨처럼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역사는 필연으로 계승된다는 것을. 선생의 생애와 가족사는 감동을 넘어 가슴 깊숙이 여운이 되고, 삶의 푯대가 되어 수많은 이들에게 말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저자 안영민.
아버지 안재구와 어머니 장수향의 2남 2녀 중 막내로 대구에 서 태어났다. 1976년 2월 아버지가 경북대 수학과에서 '국가관 미확립'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된 뒤, 1977년 여름에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이 터질 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간첩 자식'이라는 냉대와 무기수로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속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1987년 3월 아버지처럼 수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경북대 수학과에 입학했지만, 그해 6월항쟁을 겪으면서 수학 공부와 학생운동 사이에서 방황을 시작했다. 민중들의 거센 투쟁으로 1988년 12월에 양심수 석방이 이루어지고, 아버지도 대구교도소에서 석방됐다.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1991년 경북대 총학생회장과 대경총련 의장, 전대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3년간 수배 생활을 하다 김영삼 정부의 수배 해제 조치로 1994년 3월에 복학했다. 하지만 그해 6월에 터진 '구국전위' 사건으로 아버지와 함께 구속됐다. 1996년 10월 석방된 뒤 1998년 <말>지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화해 국면이 열리자 2001년 '남북이 함께하 는 통일언론'을 표방하며 창간된 <민족21>에 참여했다. 북을 10여 차례 방문하고 편집국장과 대표이사를 맡아 왕성하게 활동했다. 2011년 7월 <민족21> 사건으로 국정원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국정원은 안재구, 안영민의 '부자 간첩단 사건'을 기획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2018년 7월에 집행유예로 7년간의 재 판이 최종 마무리됐다. 2020년 7월 8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사회운동에 복귀했고, 현재 사단법인 평화의길 이사장, 전대협동우회 회장, 경북대 민주동문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말>지와 <민족21>의 기자로 일하면서 쓴 책으로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 《행동하는 양심》, 《행복한 통일 이야기》가 있다. - 『아버지 안재구』(안영민 지음 | 내일을여는책 펴냄 | 2025) 책 중에서.
[책 속의 길] 223
이대동 / 대구경북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경북대 민주동문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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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