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어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중구 서성로 13길 7-20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상화 시인의 시구가 적혔다.
중절모를 눌러쓴 시인의 모습을 본딴 그라피티가 거리와 벽마다 그려졌다.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한옥으로 된 작은 공간이 드러난다. 민족시인 이상화 시인이 나고 자란 대구 생가터다.
골목길 입구에 이상화 생가터라고 적혀 있지만 인적이 드문 동네에 발걸음이 뜸하다. 이상화 생가터에 자리잡은 공간은 한옥카페 겸 복합문화공간인 '라일락뜨락 1956' 간판이 불을 밝혔다.
수령이 200살로 추정되는 라일락(수수꽃다리) 꽃나무가 뜨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상화나무'라는 별명이 붙은 고목은 시인의 탄생과 일제강점기 민족의 아픔을 지켜보며 지금도 터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라일락나무는 시간을 거슬러 지역을 지키고 있지만, 정작 이 장소는 많은 이들에게 잊혀졌다.
라일락뜨락이 아닌 대구 중구 계산동2가 84번지 '이상화 고택'이 생가터로 잘못 알려진 탓이다. 고택은 시인이 숨지기 전 4년을 머문 곳이다. 실질적으로 태어나서 32세까지 자란 곳은 라일락뜨락이다.
원래 주소는 서문로 2가 11번지로 모두 400여평에 이르는 넓은 부지였다가, 지난 1956년 4개의 번지로 분할되면서 3개 번지는 다른 집 주인들에게 팔렸다. 과거 생가터의 안채에 해당하는 부분만 현재 라일락뜨락으로 남게 됐다. 새 주소가 시작된 '1956년'을 기려 라일락뜨락이라는 공간이 2018년 문을 열었다.
문화예술 활동의 무대가 되고, 시민사회와 정치인들이 민족시인의 정신을 되새기는 아지트가 되었다. 하지만 라일락뜨락 1956은 7년 만에 문 닫을 위기에 놓였다. 경영난을 버틸 수 없어 새 주인을 찾고 있다.
권도훈 라일락뜨락 1956 대표는 11일 오후 "아쉽지만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됐다"며 "새 사람이 이 곳을 사거나, 이 공간의 주인이 되어 또 다른 스토리를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완전히 잊혀진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를 발굴해 리모델링하고 카페로 꾸며 시인의 정신을 담은 활동을 펼쳤다. 개인사로 힘들었을 때 우연히 이 곳을 소개 받아 라일락향기와 이상화 시인의 스토리에 취해 7년을 '이상화 생가터 1호 지킴이'를 자처했다. 그렇게 식민지 시대 아픔을 시로 써내려간 청년 시인에게 푹 빠진 7년이었다. '상화'는 권 대표의 뮤즈(시적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디자이너이자 미술화가로서 시인의 생애를 담은 여러 작품을 카페 곳곳에 전시했다. 입소문이 퍼지며 이상화 시인을 전공한 전국의 전문가들을 비롯해 여러 유명 인사들이 카페를 찾았다.
그러나 유명해지는 것과 상업적 성공을 하는 것은 별개였다. 외따로 떨어진 골목길에 있는 카페는 2020년 코로나19를 맞아 직격탄을 맞았다. 이상화 생가터라는 사실도 거의 알려지지 않아 지자체의 도움도 전무했다. 개인 빚을 내 공간을 존속시켜왔지만 한계에 부딪혀 올해 5월 라일락뜨락을 내놓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 권 대표가 가장 바라는 것은 생가터가 지역사회의 유산으로 시민들 곁에 남는 것이다.
권 대표는 "정부나 대구시가 매입하면 가장 좋고, 아니면 일반 문화재단이나 뜻이 있는 개인이라도 이상화 생가터를 사들여 공공의 자산으로 되살렸으면 좋겠다"며 "대구시가 지난 2023년 무영당을 매입해 청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이상화 생가터도 독립운동가인 이상화 일가의 정신이 깃든 곳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상징적인 기념공간으로 조성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라일락뜨락의 이 같은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자 정치권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 육정미(비례대표) 대구시의원은 11일 오전 대구시의회 본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해 "대구 정신과 정체성을 담은 이상화 생가터를 방치해선 안된다"며 "시민 자산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상화 선생과 그의 형인 이상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인물로 두 형제는 대구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라며 "생가는 1956년 철거돼 오래 방치됐고 개인이 간신히 되살렸지만 운영 중단 위기"라고 지적했다. 또 "일부 시민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대구시가 책임을 못 다다한 부끄러운 현실"이라며 "게다가 중구 계산동 이상화 고택과 이상화 생가터가 혼동돼 생가의 존재를 모르는 시민도 많다"고 비판했다. 이어 "생가터의 수령 200년 라일락 나무 같은 상징적 유산은 민간의 힘만으로 보존에 한계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독일 괴테하우스와 영국 셰익스피어 생가처럼 세계적 문화 유산은 정부와 공공기관이 관리해 문화콘텐츠로 발전시켰다"면서 "문화유산 보존은 후손에게 빚진 책무다. 대구의 상징 유산을 개인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대구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말고 우리가 보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생가터에 대한 "대구시 매입과 책임 있는 관리 체계 확립"을 강조했다. 앞서 2021년 제정된 '대구광역시 독립운동정신 진흥조례'가 독립운동 유적지 정비와 지원 근거를 두고 있는만큼, 실질적인 보존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화 고택과 연계 운영,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이 추진하는 문화예술인 가치 확산 사업과 결합해 생가터를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기념공간으로 발전킬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진행하는 '제23회 이곳만은 지키자' 보전대상지 시민공모전에 대구의 한 시민이 이상화 생가를 등록하는 등 구명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공모 결과는 오는 9월 말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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