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간절한 기도로 이루어진 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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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양영순의 천일야화』(양영순 저 | 김영사 펴냄 | 2006.10)


「천일야화」라고? 그것도 양영순의 만화책?!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양영순의 「천일야화」를 발견한 날, 벌떡거리는 심장을 찍어 누르며 6권 묶음의 단행본을 냉큼 주문하는 한편 ‘그동안 왜 나만 몰랐었냐고!’ 조바심에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그만큼 양영순은 나를 흥분시키는 작가였다. 아아, 어찌 잊으랴! 그의 「누들누드」를!

열혈만화애독자였던 내가 20대에 만난 「누들누드」는 살아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작품이었으니. 풍성한 그림 실력, 박진감 넘치는 컷의 전개, 순식간에 빵! 터뜨리는 재치와 유머, 섹스를 대놓고 다루는 과감한 주제의식까지. 내 머리를 짓누르던 조선여인이 슝~ 하고 나가떨어지는 해방감을 느꼈었다. 일찌감치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 던 그의 포부대로 섹스와 엽기 코드의 대명사가 된 그가 펼쳐낸 첫 이야기책, 「천일야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양영순식 재해석이려니 했는데 이건 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기초적인 뼈대, ‘왕이 하룻밤을 함께 보낸 처녀들을 매일 밤 죽여 피의 궁전을 이루지만 충직한 신하의 딸이 천일 동안 풀어내는 이야기로 광기를 멈춘다.’는 틀은 같다.
 
『양영순의 천일야화』양영순(만화가) 저 | 김영사 펴냄 | 2006.10.31
『양영순의 천일야화』양영순(만화가) 저 | 김영사 펴냄 | 2006.10.31
 
 

그러나 ‘마신과 마신사냥꾼, 마신이 된 인간들’은 전형적인 만화 캐릭터에서 찾아보기 힘든 신선함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저마다 사연을 지닌 마신들, 비열하고 잔인한 마신 사냥꾼들, 영혼을 팔아서라도 마신의 힘을 얻으려는 연약한 인간들, 그 모든 이야기 속에는 가르치지 않는 교훈이 곳곳에 스며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존재와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긴 「천일야화」. 특히 ‘마신역병 퇴치법’으로 쓰인 쌍둥이의 이야기는 5, 6권에 걸쳐 제법 많은 복선을 깔고 심오하게 다룬 만큼 감동이 깊다.

"우리가 누리는 이 하루가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과 기도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하소서"

세라쟈드의 주옥같은 마지막 대사는 슬그머니 눈 가를 훔치게 한다. 작가의 저력을 확인하는 순간, 아껴가며 천천히 읽는다는 것이 그만 또 날밤을 꼴딱 새며 하루 밤에 다 보고야 말았다.

원래 「천일야화」는 2005년에 어느 포털 사이트에 연재된 웹툰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웹툰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작가는 컴퓨터 마우스로 스크롤해 넘겨야 하는 웹툰의 성격에 맞게 완벽한 ‘세로 그리기’를 창출했다. 5년 동안 준비하고 다듬어서 내놓은 그의 웹툰은 대박이었다. 하루 방문객만 30만명. 인기에 힘입어 이듬해에 6권의 만화책으로 다시 묶여졌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지나 불과 일주일 전, 단행본을 통해서야 정보를 알게 된 나는 ‘도대체 세로그리기가 뭐 그리 별난 거지?’ 반신반의 하면서 그의 웹툰을 찾아 컴퓨터로 스크롤 해가며 다시 봤다.

맙소사! 완전히 다른 연출! 마치 영화 필름을 뽑아서 빛에 비춰보는 느낌이었다. 종이책의 여백을 좋아하는 내가, 꼭 챙겨보는 웹툰이라도 단행본을 일부러 소장하는 내가, 「천일야화」만은 반드시 웹툰으로 봐야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 그런데 웹툰은 어떻게 소장하지? 그나마 단행본 매 권 앞뒤에 보탠 부록들로 위안을 삼을 뿐.
 
 
 





[책 속의 길] 66
이은정 / 평화뉴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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