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원하지 않는 정치 개혁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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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칼럼] 좋은 세상을 바란다면 깨어 있어야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면 이론, 운동, 정치의 3박자가 맞아야 한다. 탄탄한 이론적 근거를 가진 개혁안이 시민운동을 통해 공감대를 넓히는 가운데 정치가 이를 현실화하는 것이 원론이다.

  반면, 정치는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므로 정치를 통한 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자면 정치부터 개혁해야 하는데 정치권이 자신에게 수술 칼을 댈 것 같으냐?’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런 분을 위해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정치권이 원하지 않는데도 정치 과정을 통해 정치 개혁이 이루어진 역설적인 사례다.

뉴질랜드 선거제도 개혁 사례

  뉴질랜드는 오랫동안 내각책임제와 소선구제를 취해왔으며 양대 정당(국민당과 노동당)이 권력을 나눠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대 정당에 불리한 비례대표제가 1993년에 도입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78년과 1981년 두 차례 선거가 변화의 계기였다. 두 차례 모두 득표율이 낮았던 국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여 집권했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집권 국민당을 ‘조작된 다수’(manufactured majority)라고 부르면서 원통해 하다가 1984년 선거에서 승리하자 선거제도 개혁특위를 결성하였다. 특위에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인사가 많이 참여하였고 위원들은 신중한 연구 끝에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제안하였다.

  독일은 연방하원 정원 656명 가운데 반은 지역구 최다득표자로, 나머지 반은 정당이 각 주별로 제시하는 명부에 의한 비례대표제로 선출한다. 지역구 당선자의 비율이 정당 득표율 이상이 되더라도 초과 의석을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따라 의원 정수가 약간 달라지기도 한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에서도 양대정당제, 소선거구제 및 지역주의 선거의 폐해를 개탄하는 사람들이 유력한 개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치권, 등 떠밀려서 국민투표 실시

  노동당은 자신들이 특위를 구성해 놓고는 정작 특위가 권하는 개혁안에는 반대했다.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양대 정당의 복점 구도가 깨질 것 같아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7년 선거 국면이 되자 노동당은, 재집권하면 이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노동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약속을 뭉개고 말았다.

  그러자 1990년 선거에서는 오히려 국민당이 국민투표를 공약했고, 선거에서 승리하자 마지못해 1992년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양대 정당이 모두 개혁에 반대하는 캠페인 벌였지만 국민투표 결과는 기득권 정당의 패배로 나타났다. 84.5%가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고 64.9%가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지지하였다. 의회는 이 결과에 따라 1993년 의회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였고, 다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최종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53.9% 찬성으로 채택되었다.

  참고로, 국민투표를 두 번 실시한 데 대해 의아해 할 독자를 위해 설명하자면, 첫 국민투표는 그 자체로 확정적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향후 추진 방향만 정하는 소위 ‘탐색적 국민투표’(indicative referendum)였기 때문이다.

뜻을 버리지 않는 한 개혁은 가능하다

  이런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우선, 기득권층과 정치권이 원하지 않는 개혁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당리당략에서 벗어난 중립적 인사가 의제 설정 과정에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로, 무조건 편을 가르는 ‘묻지 마’ 투표에서 벗어나서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국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뉴질랜드 사례와 같은 개혁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는 멀게만 보이던 제도 개혁도 예기치 않게 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진정으로 좋은 세상을 바란다면 이론을 다지고 공감대 확산에 노력하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설령 개혁 실현이 안 된다고 해도 노력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 뉴질랜드 사례는 아래 문헌을 참고하였다.
강원택, “뉴질랜드”, 박찬욱 편, <비례대표 선거제도>, 박영사, 2000, 71-92면.







[김윤상 칼럼 59]
김윤상 /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yskim@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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