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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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곤 칼럼] 몰락에도 윤리가 있다


한적한 시골 야산 구석이 ‘개판’이 됐다. 마을과는 한참 떨어진 이곳에 어느 날 움막이 들어서더니 사내는 철망을 치고 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유기견을 잡아다 오는지 개는 금방 불어났다. 저들끼리 교미하면서 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개우리는 좀 더 커져서 산을 파고들었다.

개 짖어대는 소리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지만 마을과 멀어서 딱히 항의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상수원 보호구역이었지만 여기까지 단속 나오는 충성스런 공무원도 없었다. 산길에서 개우리는 멀지 않았다. 그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개의 눈빛을 보는 순간, 금방이라도 우르르 우리를 뛰쳐나와 허벅지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애써 외면하면서 서둘러 개들의 구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뛰지도 못하고 속보로 도망쳤다. 등을 보이자 개들이 더욱 맹렬히 짖었다.

가끔씩 그 산을 오르던 나는 이후 ‘개들에게 길을 뺏기고’ 산 위쪽으로 둘러 다녔다. 어느 날 개들이 사라졌다. 움막이 들어선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유기견들이 하도 많아서 ‘개값이 똥값’이 됐던 때였으니까 한참 전 얘기다. 반려견과 사시는 분들에게는 읽기 거북한 얘기가 됐다. 개들은 사라졌지만 개우리만 남은 그 산길은 나도 모르게 다시 찾지 않게 됐다.

가끔 그 개들이 생각날 때면, 그때 내가 참 겁쟁이였다 싶다. 산길 눈앞에서 마주친 그들의 눈빛은 공포였지만, ‘사육되는 슬픔’과 ‘갇힌 분노’를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민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못한 나는 겁쟁이였다. 뛰지도 못하고 잰걸음으로 내빼던 내 뒷모습을 개들은 비웃었을 것이다.

요즘 그 ‘개떼’를 다시 본다. TV 화면을 통해 자주 보인다. 요즘 개떼는 그때 산길 옆에서 보던 개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인 것 같다. TV 화면 속 모자이크된 그들의 표정에는 사육되는 슬픔도, 갇힌 분노도 없다. 오히려 ‘사육되는 기쁨’과 ‘갇힌 편안함’만이 두드러져 보인다. 단식 농성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벌이던 일베 무리들 말이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학여행 가던 생때같은 자식들 수백 명이 함께 수장 당했다. TV로 전국에 생생히 중계까지 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탈출한 승객 말고 단 한 명도 구조되지 못 했다. 말문 막혀 아예 말길이 끊기는 기막힌 현실에서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것.

너무도 당연한 이 요구 하나를 정부는 귀로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부는 유가족들이 한 번도 요구한 적 없는 특례 입학이니, 보험금이니, 보상금이니 하는 '핵심과는 무관한 잡담들'을 끊임없이 흘렸다. '돈문제와 특권이라는 프레임‘으로 유가족들을 가둬 국민적 관심과 애도 분위기, 무능한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차단하면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아예 내놓고 정부는 스스로를 커밍아웃한 셈이다. 박근혜 정권의 진정한 의도와 입장은 세월호의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하며 유가족을 매도하는 것이었다.

시정잡배보다 못한 정부의 기만・무시전략 앞에서 억장 무너지는 가슴을 버텨내기 위해 유가족들이 택한 마지막 방법이 단식농성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탈진해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유가족이 속출했다. 그런 가족들 앞에서 피자 100판에, 치킨이며 맥주를 배달시켜 파티를 벌이다니. 처음에 그들 일부는 서울시청 앞에 차려진 유가족들의 식탁에서 그 짓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불과 몇 백m 떨어진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 떼로 모여들어 ‘광기어린 처먹음’을 즐겼다.

이것은 세월호의 진상만큼이나 충격적인 '인간의 문제'였다. 인간은 얼마나 냉혈할 수 있으며 얼마나 사악한가. 충격의 강도는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떠올리게 했다. 전시도 아닌 평시에, 이민족도 아닌 이웃에 대해, 그리고 반역자나 범죄자도 아닌 수백 명의 무고한 죽음을 집단으로 모여 조롱하고 모독할 수 있다니.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사례는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희생자들을 어묵에 비유하며 올린 어묵 먹기 인증샷이 겹쳐지는 장면은 토악질하도록 참혹하다.

산길 옆 개들은 내가 아무리 주인을 원망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상관없이 주인이 주는 사료를 먹고 잘 컸다. 저들끼리 교미하며 금방 우리를 채웠다. 주인이 사료를 줄 때면 좋아 날뛰었다. 요즘 개떼에게 먹이를 주는 바로 그 사내는 종편과 ‘조중동’이다. 지난 정권이 온갖 악수를 둬가며 종편을 출범시킨 이유가 이것이다. 이 정권은 일베의 숙주다. 풍부한 먹이를 먹으며 그들은 더 큰 알을 깠다. 한국전쟁 기간 수만 명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을 부활시켰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하도 깊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못다 캔 진상을 캐내려는 포클레인이 뼈무덤을 찾아 어느 산천을 파헤치고 있는데 말이다.

『몰락의 에티카』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평론집이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의 문장들은 읽는 나를 금세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난해함에는 관대했지만 태만함에는 냉담했다”는 그가 신세대 시들을 옹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일면 지나쳐 거북하기도 하다. 다만 ‘몰락의 윤리학’이라는 그 이름의 의미만을 차용했다. 몰락에도 윤리는 있다.

대통령은 급조 냄새가 나는 외유를 떠나고, 비서실장은 비리혐의가 드러났는데 말이 없고, 전직 비서실장은 비리 혐의가 드러나자 잠적한 청와대를 보면, 이전 산길 옆 텅빈 개우리가 생각난다. 지금처럼 일베나 서북청년단과 같은 무리에게 끊임없이 ‘개사료’를 던져주며 정권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몰락의 징조다. 서북청년단을 내세워 정권을 유지하던 이승만 정권의 몰락이 그것을 말해준다. 몰락에도 윤리가 있다. 선량한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함께 몰락하는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조용히 자신의 과오를 거둬 홀홀히 물러가기를.






[김윤곤 칼럼 6]
김윤곤 / 시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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