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올바른 사람이 먼저 손 내밀면 안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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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칼럼] "이상적 이념이 아니라 흠결 있어도 부등켜 안고 가야할 지금 그 사람"


 사람은 멀리서 보면 겉모습만 알 수 있다. 외모와 명함, 말과 글이 보인다. 적당히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특별한 갈등이 없다. 가까이서 보게 되면 일상이 보인다. 일상의 자잘한 행태를 보게 된다. 특히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일을 해보면 ‘알맹이’가 드러난다. 그가 행하는 것이 그가 담고 있는 삶이다. 그 사람의 일상은 그 사람의 진짜를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불만과 불신은 멀리 있던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생긴다. 사람 사는 동네의 이치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동과 인권, 민주주의와 통일, 생명과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똑같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내세우는 이념과 노선이 정의롭다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까지 저절로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망하기 직전의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 인한 것보다, 내부적 성찰로 보다 나은 삶과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과 집단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월가 점령 시위를 했던 시위대가 1:99를 내세웠다. 이후 국내 진보진영에서도 1:99의 싸움이라면서 ‘우리는 99%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소수 기득권세력 1%와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결구도로 만들었다. 한편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서 1:99의 싸움은 거의 없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싸움은 99% 내부의 싸움이다. 상충되는 이해관계에 서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고 싸운다. 99%안에서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 부러움과 시기, 질투와 배반이 일상으로 일어난다. 99%는 일자리와 상권, 지역과 혈연, 이념과 노선으로 층층이 갈라져 있다. 거대한 힘을 가진 1%와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 99%의 연대가 우선이다. 공동의 목적이 있다면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 연대의 상식이다. 그러나 누구와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결국 연대할 수 있는 폭을 스스로 제한시켜버린다. 명백한 공동의 목적이 있어도 힘을 합치지 못하는 것은 누적된 불만과 불신에다가 현실의 힘을 넓히지 못하는 생각에 있다.

 가장 첨예한 것이 정치권이다. 야권의 거대정당과 진보정당 사이에 상호존중에 기반한 협력과 연대의 좋은 기풍이 얼마나 있는가? 가치와 노선의 차이, 탈당과 철새정치,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다야구도가 되었다. 20대 총선을 맞아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 당을 공격하고 국민의 당은 더불어 민주당을 공격한다. 두 당의 경합지역에서 후보단일화의 성사는 전체 의석수의 여야구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진보정당들도 서로의 선명성을 부각하는데 여념이 없다. 선거는 경쟁이고 경쟁에서 자기정체성의 부각은 필수적이다. 상대에 대한 비난 비판도 사실에 입각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모 후보 측의 ‘저격포스터’가 사람들의 비난을 산 것은 상식선에서 지켜야할 ‘예의’의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제1야당 최고위원까지 지낸 사람이 다른 야당 대표를 향해 “괴물”이라 칭하고 “역사의 반역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10% 국민의 지지를 받는 공당의 대표에게 할 말은 아니다. 그의 말의 의도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런 표현은 ‘협박’이지 ‘설득’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

<한겨레> 2016년 4월 6일자 1면
<한겨레> 2016년 4월 6일자 1면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던 추미애 의원이 더불어 민주당에 있다. 박근혜를 만들었던 김종인이 제1야당의 선거를 이끄는 것은 말이 되는가 말이다. 종북과 패권주의를 들며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던 조승수, 노회찬, 심상정은 2012년 통합진보당에서 다시 구 민주노동당 사람들과 힘을 합쳤다. 현실 정치는 이렇게 흘러간다. 이 모든 과정에 합리적인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가? 오직 설명 가능한 것은 현실은 이전과 달라졌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았던 것이다. 논리적으로 옳고 그른 일을 구분하여 정치가 옳은 것만 취했는가? 현실정치에서 우리가 할 일은 지금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이다. 분열된 현실에 분노하여 틀린 그들을 단죄하는 심판자가 아니라, 흩어져 있는 모래 알갱이를 모으기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오래된 정치구조의 고착화로 인해 전진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현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성질 부리지 말고 진짜 정치를 해야 한다.

 기존 정당에서 탈당하여 새 당을 만들고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기존 정당과 대립각을 세우고 서로를 향한 공격이 도를 넘어서는 모습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누구를 절대선으로 누구를 절대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정치인들이 자신의 현재만을 긍정해야 하는 상황이어도 바로 어제의 동지를 적으로 ‘겨누어 총’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어제는 누군가가 다수였고 오늘은 그 다수가 소수가 되는 현실의 반복이다. 이런 현실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권력을 잡고 싶은 사람에게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에게 가성비 높은 수단이다.

 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옳아서 이루려는 것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인가? 보다 좋은 세상을 하루라도 더 먼저 실현시키는 것인가? 나의 독야청청 옳음을 입증하고 자기만족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면, 연대로 아주 더딘 한 걸음을 더 나아가야 한다. 입장이 올바른 사람이 먼저 고개 숙여 손을 내밀면 안 되는 일인가? 함께해야 할 상대를 저주하며 적으로 돌리지 말고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다시 힘을 합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 지금 속이 상하고 분통해도 더 큰 일을 위해 다 표현하지 않고 참는 인내도 지혜롭게 발휘해야 한다.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은 현실에 없는 이상적인 이념과 가치가 아니라 흠결 있어도 부둥켜안고 가야할 지금 그 사람이다. 사람을 내 목적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 자체로 대할 때 정치는 달라질 것이다.

 오늘 만난 대학생에게 투표할 것이냐 물으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투표는 해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투표해도 무언가 바뀔 것 같지 않다고 한다. 거는 기대가 없으니 행동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투표해도 세상도 내 삶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보아온 정치는 더럽고 또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삶에 열심인 것이다. 스펙을 쌓고 절약하고 더욱 더 노력하는 것이다. 뿌리 깊은 환멸에 빠진 유권자들이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투표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얼기설기 촘촘히 얽혀져 있는 관계의 그물망을 뚫고 깊숙이 들어가고, 정의의 심판자가 아니라 흙탕물속의 아교가 되어야 한다. 총선 이후에도 우리는 또 살아내야 하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좋은 세상을 향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택진 칼럼] 32
오택진 / <연구공간Q+> 대표.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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