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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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 /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저 | 민음사 펴냄 | 2016)

 
술집 화장실 벽에 있는 작은 구멍. 그 구멍을 막은 꼬깃꼬깃한 휴지를 보고 눈물지은 밤이 있었습니다. 취한 와중에 쭈그려 앉아 휴지를 뭉치고 있었을 누군가는 또 다른 나였어요. 남자친구에게 맞고 온 친구의 손을 피가 안 통할 때까지 잡고 또 잡은 밤도 있었습니다. “어째서 경찰서에 가지 않냐, 헤어지지 못하냐” 다그치다 결국엔 나도 같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무수히 많은 밤이 있었습니다. 나, 친구, 그리고 우리는 모두 날이 밝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어요. 상처를 내보여도 바뀌는 게 없다는 걸 일찍이 깨달아서 그랬을까요. 그저 서로를 위로하는 것만이 다음을 살아갈 힘이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가 당신의 전화가 오면 나는 늘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죠. 짧은 단신 기사 속 이야기들은 죽음의 냄새를 풍겼고, 그건 결코 타인의 이야기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내가 살던 자취방 바로 옆 건물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같은 학교 사범대 여학생이었죠. “술에 취했었대. 그 늦은 시간까지 클럽에서 뭘 했다니? 여자애가 일찍일찍 다녀야지.” 당신은 우려 섞인 목소리로 한동안 저녁마다 내가 집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전화했어요. 당신에게 그 일은 ‘내가 조심하면 없을 일’이었죠.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친구의 이야기, 아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내 이야기였어요.

좀 더 옛날이야기를 해볼까요. 어느 밤, 늦은 시간까지 놀이터에서 놀던 8살의 내가 같은 동네 남자아이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일을 기억하세요? 무언가 죄지은 마냥 집에 돌아와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나는 당신께 이야기를 했죠. 그 아이의 친구들이 나를 둘러싸고 낄낄댔다는 이야기는 차마 하지 못했어요. 인상 쓴 당신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그리곤 지나갔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신은 내 이야기를 조금 과장됐다고 느낄까요?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선물하기로 마음먹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그 아이를 학교에서 봐야 했던 불편함, 성장과 함께 반복되던 일들. 무덤덤해지는 나의 모습… 잊고 있던 8살 때의 사건이 생각날 만큼 책을 읽는 게 힘들었어요. 26년의 삶 속에서 깨달은 건 분명했죠. 내가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 남자에게 곁을 줄 때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해야 하며 늦은 시간까지 놀 때는 목숨까지도 걸어야 한다는 것을요. 당신도 비슷한 경험과 각오, 체념과 포기를 겪으며 지금의 나이가 되셨겠죠.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그 삶을 생각했습니다. 당신 안의 눈 감고 넘어갔던 많은 일들이 안쓰럽고 내가 겪을 길은 절대 그렇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음에 답답해졌어요. 주인공 김지영은 특별히 눈에 띄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부모를 둔 82년생 여성입니다. 쓰다 보니 내 이야기 같네요.

하루하루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을 당신도 느끼시나요? 서지현 검사의 폭로와 이 책, 82년생 김지영을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억눌려 있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와 ‘운동’이 됐어요. 대학교수, 문화·예술계, 정치인…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면 위로 떠올랐죠. 용기였고, 상처받은 삶의 한 걸음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여성단체들은 피해자를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많은 시민이 응원하며 힘을 실어줬죠. 하지만 당신과 이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건 왜 그렇게 껄끄러웠을까요? 2만여 명의 여성이 모인 집회가 뉴스에 나온 저녁,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나는 친구들과 페미니즘 공부모임을 하고, 홀로 기사를 스크랩할 정도로 그 뉴스에 관심이 많지만, 남편과 자식을 우선시 하며 모든 가사노동을 책임진 당신의 시간이 떠오를 때면 애써 생각을 꾹꾹 눌러 외면했어요.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쳤을까요?

우연히 당신의 일기장을 봤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우리 함께 내 다이어리를 사러 갔죠. 동네에서 가장 큰 문구점에 가서 가장 예쁘고 비싼 다이어리를 집어들고 나는 환하게 웃습니다. 한 두 장이나 썼을까, 몇 달이 지나 책꽂이에 처박아둔 다이어리가 문득 기억나 집어 들면 당신의 글씨가 보입니다. 시간의 무의미함에 대한 끼적임이 셋째 장쯤 보이고, 그 다음 장부터는 온통 장 볼 것, 딸 용돈, 아들 한약, 남편 출장, 전화 메모입니다. 일기장이라기보다 숙제장이 맞겠네요. 중간 즈음 색연필로 작게 그린 그림도 보입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필사한 한두 장의 페이지가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여성으로서의 내 삶은 결국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이해하는 걸 저 멀리 미뤄두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나는 늘 당신에 대해 답답해했고, 쉽게 이야기했으며 ‘나는 그렇게 안살거야’ 다짐해 왔어요. 책이 말하죠. 나는 내가 피하고 싶던 그 길 위에서 걷게 될 거라고. 당신도 내 나이를 살아내셨고 나도 언젠가 당신처럼 엄마가 될지 모르니까요. 아, 이 책에도 김지영의 어머니와 어머니로서의 김지영이 나와요.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p37)
 
"재밌어. 엄청 재밌어. 지금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 아내는 여전히 초등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고, 나는 아내가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것밖에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김지영 씨도 그랬으면 좋겠다"(p174)

엄마, 아직도 홀로 지난 일을 되새기며 우는 누군가의 밤들이 있겠죠. 나는 체한 것처럼 그들이 마음에 걸려요. 여전히 여성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거에요. 다만 ‘말해도 괜찮은 여성, 고소해도 안전한 여성, 연대의 선두에 나서는 여성이 더 많이 나온다면 홀로 우는 밤들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요. 더 많이 이야기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 우리의 외줄도 좀 더 단단해지겠죠.

이번 주말엔 집에 갈게요. 저녁은 엄마가 좋아하는 외식으로 해요.
 
 
 
 
 
 
 
 
 
[책 속의 길] 137
김보현 / 대구가 좋아서 돌아온 26살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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