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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장수(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정국은 한국정치사에서 또 한 차례의 ‘분출의 순간’을 제공하고 있다. 촛불집회라는 분출 이후의 침체와 퇴행을 고려하면, ‘서거정국’을 통한 급속한 정치적 반전은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이다.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며, 한국현대사 자체가 반전이 거듭된 역사였다는 어떤 사학자의 지적도 있듯이, 이번 ‘서거정국’도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태일 교수는 ‘성찰’을 화두로 민주개혁세력의 반성을 촉구하는 글을 내놓았다. 이글에서 그는 ‘정치적 다양성’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지역주의와 주체적 요인을 중심으로 대구지역의 정치적 독점구조를 살펴보고 연대를 중심으로 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대체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며, 현재의 위기는 진영의 위기라는 평가와, ‘지역주의의 이데올로기화’의 심화에 대한 분석은 특히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점에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 형식의 토론문을 싣는다.
첫째, 위기는 지속(어쩌면 87년 투쟁 이후로 ‘헤게모니의 위기’ 국면은 지속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되었으며, 이러한 위기에 대한 ‘현재적 인식’의 결정적 계기는 ‘서거국면’이었다. 따라서 현재적 위기에 대한 성찰과 대안의 모색을 위해서는 우선 ‘서거국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욕을 많이 얻어먹던’ 전 대통령의 비정상적인 죽음에 그토록 많은 국민들이 ‘감성적 추모’를 넘어선 ‘정치적 분노’를 표출하게 된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분노의 연대’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종의 정치적 함의가 무엇이며, 민주개혁세력은 이것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토론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분명 나름의 ‘사람 사는 세상’을 추구하였지만, 그의 목표는 명백히 실패하였고 어쩌면 그는 ‘사람 사는 세상’의 실현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상황을 스스로가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무언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그의 ‘진정성’을 확인하였기에, 그리고 이것이 이명박 정부의 일방적 독재와 대비되어 더욱 부각되었기에, 그의 죽음 앞에 추모의 정을 넘어선 정치적 연대를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분노의 연대’ 저변에 깔린 것은 ‘노무현’이라기보다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추모와 분노의 정서 저변에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지배에 따른 양극화가 더욱 강화되는 현재,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깔려있다. 그러기에 민주개혁세력은 날로 퇴행하는 이명박 시대에 ‘사람 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전진시킬 방법의 모색을 통하여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
둘째, 이 토론회의 기획 의도는 대구지역 민주개혁세력의 성찰과 내년 지방선거에 대한 대응이다. 이에 대해서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성찰’이 ‘선거’와 연결되기 위한 보다 현실적인 설득력이 필요할 것 같다.
토론자는 현재의 정세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낸 국면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선거는 아직 11개월이 남았고, 현재 정세에서 선거를 중심으로 하는 연대가 ‘사람 사는 세상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핵심적인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의 근거는 그리 구체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거칠게 말하면 ‘서거-성찰-선거’라는 흐름이 다소 기계적으로 느껴지며, 오히려 이러한 ‘익숙해진 구도’에서 부분적인 탈주가 모색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최근의 촛불집회나 아고라로 대표되는 인터넷 정치, 그리고 ‘서거정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대중의 정치적 감수성은 선거정치의 그것을 떠나고 있다. 현재까지는 비록 단속적이고 경향적으로 발견되고 있지만, 대중은 대의적 정치구조를 넘어서 참여적 정치구조의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복잡화된 현대사회에서 대의정치에 내재된 ‘대표성의 위기’는 본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제도개선이나 대표자 개인의 노력 여하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중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으며, 이를 아직까지는 찰라적인 수준에서 표출하고 있다. 한계가 많으며, 이것의 미래도 불투명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개혁세력의 고민은 선거정치 수준에서 고정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와는 또 다른 수준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민주개혁세력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대중의 ‘대의정치 밖의 정치’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의미부여와 수렴을 통하여, 이를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라는 현실 정치상황과 어떻게 정치적으로 결합시킬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거정치 그 이상에 대한 고민을 포함한다. 물론 이것이 선거정치에 대한 ‘안티테제’ 수준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대중의 이러한 흐름을 선거정치라는 단일한 구심력으로 흡수하려는 시도도 정당하지는 않다. 적어도 최근 대중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행동은 제도정치에의 구심력이기보다는 이것에 대한 원심력에 가깝다. 이와 관련하여 토론자의 개인적 소망을 말하면, ‘대의정치’와 ‘대의정치 밖의 정치’가 보나파르트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긍정적으로 불안한 정세’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셋째, 토론회의 기획의도에 따라서, 이글은 대구지역의 정치적 다양성의 모색을 주로 선거정치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글의 부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글의 핵심적 논제는 ‘지역주의’와 ‘정당운동’이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선거과정과 결과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현실화되고 있으며, 그러기에 현실적으로 정당운동은 지역주의 극복의 핵심적인 맥락이 될 수 있기에, 글쓴이의 문제의식은 시의적절하다. 또한 글쓴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기존 정당의 지역주의 극복전략에 대한 평가와 전망의 제시도 상당 부분 생각을 동의를 한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보다 구체화되어야 할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먼저 글쓴이의 지적처럼 사안이 있을 때마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연대론’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전면적 연대의 감수성이 필요한 선거연대가 현재 다시 요구되는 상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유의 제시가 필요할 것 같다. 이글 속에서는 주로 지역주의적 정치상황을 지적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새롭게 제기되는 것이 아닌 일상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지역주의’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서민의 열망에 기초한 ‘서거국면’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결합하여, ‘반지역주의적 선거연합’을 추동하는 국면의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싶다. ‘언제나 지역주의 극복이 핵심인가?’라는 점이다. 물론 지역주의가 한국정치의 핵심적인 병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대구지역은 더욱 그러하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역주의의 극복’이라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하물며 한나라당 지지자도 동의가 가능한) 추상적 가치에 대한 합의보다 ‘어떻게 지역주의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평가와 합의가 더욱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지금껏 계속적으로 반복된 규범적 구호만으로 구체적이고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역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이념적․몰정책적 한국정치지형의 불행한 결과이지, 그 원인은 아니다. 말하자면 용산사태나 비정규직 사태가 지역주의 때문에 발생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지역주의는 이러한 사태를 정당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다양한 의식적 틀거리 중의 핵심적 틀거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특히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지역주의 극복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여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지역주의가 사라진다고 해도 한국정치를 비민주적인 방향으로 인도하는 원인으로서, 용산사태나 비정규직 사태를 발생시키는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해방되는 것도 아니다. 지역주의 자체에 대한 반복되는 고민과 연대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자의 생각으로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연대에서, 지역주의의 극복 그 자체에 대한 합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떤 정책과 이념으로 지역주의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야말로 더욱 중요하다. 지역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국민기본권의 보장, 사회적 약자의 보호, 공공성의 확대 등과 같은) 민주적 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지역주의 극복 그 자체보다는 지역주의에 의해서 왜곡된 정치시장의 정상화에 있다. 결국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연대전략도 ‘연대’보다는 ‘연대할 가치’에 대한 합의가 핵심이다.
만약 대구지역에서 선거연대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면, 연대의 중심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규범적 구호가 아니라,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정책과 무기’에 대한 구체적 전략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러한 전략은 또 다른 기득권 정치세력의 세력 확장에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대구지역 민주개혁세력은 ‘지역주의 프레임’의 지나친 구심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다른 모든 정치적 쟁점을 흡수하는 지역주의의 강력한 흡인력에서 벗어남을 통하여 더 많은 정치적 주장의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오히려 지역주의 극복의 대안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적절한 상황이 되면 마치 조건반사처럼 제기되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연대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코끼리는 생각하지 말자’)를 통하여, 지역주의의 극복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문제의 해결에 접근하는 시각도 필요할 수 있다.
현재 상황이 비록 민주개혁세력의 ‘진영의 위기’일지라도,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연대를 모색하다가 결국 이것이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토론자는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슬로건에만 온전히 동의할 수 없기에, 현재의 사회적 균열이 ‘광범위한 선거연대’가 가능할 만큼 보편적인 성질의 것인가가 일단 의심스럽다. 또한 연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 모순의 해결이다. 현실적 모순의 해결이 (선거)연대를 통해서 보다 가능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를 위한 보다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자들의 상황적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개혁세력이 소수자이자 약자인 상황에서 민주개혁세력은 그들 사이의 최소한의 교집합을 확인하고 이를 확대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글쓴이의 지적처럼 비례대표 확대 등의 제도개선을 위한 노력 등이 그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지만, 정세의 변동에 따라서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연대는 반드시 논의되어야 하고 진행되어야 할 사안이다. 지역주의가 한국정치의 발전을 지체시킨 고질적인 병폐이고, 정당운동이 지역주의의 극복과 핵심적으로 연관된 사안이라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정당운동과 선거연대를 위한 기준은 ‘정당의 합의’를 넘어선 ‘시민사회의 합의’에 기초해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여기에는 다음의 사항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지배이데올로기가 된 지역주의의 수혜자이기도 한 정당(들)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연합 테이블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있다면 이러한 정당(들)에게 어떠한 페널티를 부과해야 하는가?
사실 여기에서는 결국 ‘민주당’에 대한 판단의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연대논의에서 민주당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글쓴이의 지적처럼 이미 지역주의 이데올로기의 수혜자이자 기득권자이기도 한 민주당의 진정한 반성이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판적 지지론’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또 한 번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거)연대는 ‘명망가’가 아닌 ‘생활의 정치’를 중심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는 글쓴이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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