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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의 새로운 신화를 짜다
이은주 / 동화 『영리한 공주』(다이애나 콜즈 저 | 로스 아스키스 그림 | 비룡소 펴냄 | 2002)
2011년 05월 13일 (금) 10:46:58 평화뉴스 pnnews@pn.or.kr

우리는 많은 공주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우리 공주님’ 소리를 들으며......  백설공주, 숲 속의 잠자는 공주, 엄지공주, 신데렐라, 인어공주, 등등. 이 중 가장 으뜸은 역시 눈처럼 희고 아름다운 백설공주다. 지금도 가장 많이 공연되는 연극은 ‘백설공주’일 것이다.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재미있고 공경에 빠진 공주들이 안타깝다가 결국엔 왕자를 만나 ‘행복했더랍니다’ 하는 결말에는 같이 안도하고 기뻐하면서 여자 아이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공주들과 시나브로 동일시 하게된다. 

  백설공주가 왕자를 만난 때는?
  마녀인 계모가 준 독사과를 먹고 죽어 유리관 속에 누워있을 때다.
  죽은 공주를 왕자가 데려가는 이유는?
  당연히 예쁘기 때문이다.
  숲 속에 잠자는 공주가 왕자를 만난 때는?
  잠자고 있을 때다.
  100년 동안이나 수 많은 왕자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공주를 구하러 오는 이유는?
  물론 예쁘기 때문이다. 덤으로 이 공주는 부자이기도 하고.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난 때는?
  계모가 시키는 일을 다 해놓고 요정이 준 호박마차를 타고 유리구두를 신고 파티가 벌어지는 궁에서 늦은 밤 잠간 왕자와 춤을 출 때다.
  잠간 춤 춘 여자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왕자가 유리구두 한 짝을 들고 온 마을을 다 뒤져서 신데렐라를 찾아나선 이유는?
  그렇다. 예쁘기 때문이다.  
  엄지공주는 손톱만 해서 아무 자신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어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무기력한 존재이다.
  인어공주의 운명은 좀 다르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사랑을 얻기 위해,  다리가 생기는 물약을 얻는 대가로 마법사에게 혀를 잘라 줘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 이야기에서 공주들이 왕자에게서 선택받는 순간은 죽거나 잠자거나 무기력하고 혀가 잘린 상태다. 일종의 ‘의식의 죽음 상태’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왕자만이 선택할 수 있으며, 선택받기 위한 조건은 ‘예뻐야’ 한다는 것이다.

왕자에게 선택받기만 하면 공주는 행복할까? 그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성품인지 알 수가 없는데... 키류 미사오가 쓴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속 백설공주를 데려간 왕자는 시체애호가이다.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외국인 아내를 살해한 남편, 한 달 만에 아내를 칼로 찔러 살해한 남편, 아내를 때리는 무시무시한 남편 이야기는 현실 속에 얼마든지 있다. 또 예쁜 여자는 항상 좋은 사람일까? 
 
   
▲ 다이애나 콜즈 저 | 로스 아스키스 그림 | 비룡소 펴냄 | 2002.04
이런 공주 이야기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를 강렬하게 조직하고 우리 사회에 내면화된다. 하나는 공주들이 멋진 왕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또는 여자답다는 것은 ‘의식이 거의 죽음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뻐야 한다’는 것이다.

공주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뼈 속 깊이 이 공주들의 생존방식을 내면화하면서 남성다움을 능동성과 주도성으로, 수동성과 의존성을 여성다움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말하는 여성, 똑똑한 여성을 우리 사회는 무례하거나 여자답지 못한 여성으로 치부하며 제거해야할 위험한 대상으로 여긴다. 동전의 양면처럼 여성들의 의식 저 밑바닥에는 너무 나서면, 똑똑하면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이렇게 기존의 공주이야기들은 입 다물고 조용히 인내하고 수용하고 말 잘 듣고,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여성, 물거품이 되더라도 왕자의 가슴에 칼을 꽂지 않는, 저항하지 않는 여성성의 신화를 구축한다. 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에는 이런 무의식들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폭력상황들이 더 오래 지속되고 반복되는 결과를 낳는다.  “여자는 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소녀들이 자신이 여자답지 못하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영리한 공주』는 수동, 의존적이며 외모 지상주의의 왜곡된 여성성의 신화를 깨뜨리고  여성성의 새로운 신화를 구축한다.

보석을 좋아하는 왕은 공주가 영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한다. 자고로 공주란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다른 왕국으로 파견되거나, 공주의 미모에 상응하는 가치와 물물교환할 대상일 뿐인데.. 그런데 아무짝에도 쓸모 없이 영리하다니... 왕은 결국 보석에 눈이 어두워, 마법사에게 공주를 팔아넘긴다. 못생긴 마법사와 그의 시종은 공주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세 가지 과제를 낸다. 뱀이 우글거리는 마법의 숲 한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영원의 물을 떠 오는 것, 독수리들이 지키는 둥지에서 마법의 루비를 꺼내오는 것, 아직까지 아무도 타보지 못한 야생말을 데려 오는 것이다.
아레뜨 공주는 다른 기사들처럼 화살과 도끼 등의 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갑옷 소리를 시끄럽게 내면서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명랑하게 숲의 꽃과 나무들에게 인사를 나누면서 들어간다.  그렇게 공주는 영원의 물을 떠오고 독수리 둥지에서 마법의 루비를 꺼내오고 야생말과 친해진다. 수 많은 기사들이 실패를 하고 목숨을 잃었지만 아레뜨는 세가지 다 성공하고 결국 성의 주인이 된다.

아레뜨 공주는 아주 특별하지도 않고 아주 용감하지도 않다. 대신 아레뜨는 그림그리기, 독서, 글쓰기, 음식 만들기와 바느질 같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감사하게 누린다. 또 공주는 주변 사물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보석에 눈이 멀어 아버지가 마법사에게 자신을 팔아넘기자, 결코 용서하지 않을 줄도 안다.

이 동화는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환상을 깨고 일상적이며 창의적인 생존방식의 유쾌함을 보여준다. 편견 없는 자유로움,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 마법의 힘을 빌기 보다는, 일상의 창조적인 작업의 ‘행함’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고, 배우고, 주위의 사람들과 협력하며, 함께 나누며 감사할 줄 아는 삶의 태도. 주체적이며 주변과 소통하며 상호작용할 줄 아는 아레뜨 공주, 건강한 여성성의 신화를 새롭게 구성해가는, 그녀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

   





[책 속의 길] 17
이은주 / 여성주의 문학치료사. 문화비평가. 경산여성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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