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40년째 '김밥' 파는 할머니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3.1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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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 종이박스 펴놓고..."자식 같은 애들 보면 기분이 좋아"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종이박스로 담을 쌓은 작은 공간에 한 할머니가 김밥을 팔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식사를 하기 위해 몰려나온 학생들은 김밥을 먹기 위해 할머니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김밥 한 줄을 꺼내 참기름을 바르고 깨를 뿌렸다. 이어, 먹기 좋은 크기로 김밥을 가위로 잘랐다. 검은 봉지에 김밥을 담은 뒤 이쑤시개 2개를 봉지에 꼽아 학생 손에 건넸다. 말없이 봉지를 받은 학생은 천원짜리 1장을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가 동전 400원을 거슬러주자 학생은 "올랐어요?"라고 되물었다. 할머니는 "미안해. 100원 올렸어. 떨이 때 오면 많이 줄게"라고 말했다.

14일 오후 1시 30분. 40년 넘게 영남대에서 김밥을 팔고 있는 황모(73.경산시 삼북동) 할머니는 이날도 김밥이 가득 담긴 은색 세숫대야를 들고 장사를 나왔다. 집에서 만들어온 김밥 50줄과 튀김은 점심시간을 맞아 조금 팔린다 싶더니 점심시간이 지나자 거의 팔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깔고 앉은 종이박스를 정리하고 캠퍼스를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곱은 손을 모아 팔짱을 꼈다.

김밥을 봉지에 담는 황 할머니(2013.3.14.영남대 중앙도서관 앞)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밥을 봉지에 담는 황 할머니(2013.3.14.영남대 중앙도서관 앞)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애들이 참 이쁘지. 이제 얼굴만 봐도 몇 학년인지 알아. 여기서 김밥 판 지 40년이 넘었는데 그럼. 와서 말동무도 해주고 음료수도 주고 가.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손주 같은 애들 보면 기분이 좋아"

매일 새벽 5시. 할머니는 경산시장에서 당근, 시금치, 어묵, 단무지를 사 김밥을 만든다. 4시간 정도 김밥을 말아 대야에 담고 영남대로 가는 버스를 탄다. 캠퍼스에 도착하면 대야를 머리에 이고 그날 장사할 곳을 찾는다. 그리고, 장소를 정하면 주변 쓰레기통에서 박스를 가져와 보도블록 위에 깐다.

이어, 할머니 몸과 대야가 들어가는 크기로 낮은 종이박스 담을 쌓는다. 햇빛과 바람을 막기 위해 챙모자도 쓰고 그 위에 수건도 둘러싼다. 눈,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나무에 올려놓고, 여름에는 그늘을 찾아 장사를 한다. 물건이 빨리 떨어지는 날은 일찍 장사를 접고 귀가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거의 공짜로 떨이 판매도 한다. 그렇게,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8시간씩 장사를 한지 40년이 됐다.

"고생이라면 고생이고 아니라면 아니지. 그런데, 이제 와 그만 둘 생각은 없어. '이 일을 죽을 때까지 해야겠다' 딱 그렇게 마음먹고 있어. 가끔 돈도 더 주고 사가고 잔돈도 안받고 가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게 더 불편해. 정말 마음은 고마운데 잔돈은 갖고 가. 나도 떳떳하게 일해서 돈 벌어. 그렇지?" 

할머니는 하루 8시간 동안 종이박스에 앉아 김밥을 판다(2013.3.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할머니는 하루 8시간 동안 종이박스에 앉아 김밥을 판다(2013.3.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할머니는 최근 3년 동안 중앙도서관 앞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90년대까지는 미술대학 주변에서 장사를 했었다. 그때는 할머니 같이 캠퍼스에서 김밥을 파는 사람이 20여명 됐다. 그래서, 거울못이나 상경대, 종합강의동, 공과대학 앞에서도 학생들은 길게 줄지어 김밥을 사먹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캠퍼스에 편의점과 카페, 식당이 생겨 지금은 할머니를 포함한 3명만 장사를 하고 있다. 원래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 캠퍼스에도 '김밥 할머니'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져 영남대와 대구대만 남았다. 대학 측이 학내 무허가 상행위를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점심시간만 되면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어. 밤늦게까지 장사하곤 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 편의점하고 식당이 들어서더라고. 이제는 나랑, 거울못, 이과대도서관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만 남았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지. 언제 나가라고 할지 모르니까..."


대야에서 김밥을 꺼내 가위로 자르는 할머니의 손(2013.3.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야에서 김밥을 꺼내 가위로 자르는 할머니의 손(2013.3.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황 할머니는 1941년 경산시 자인면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8살이 되던 해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전쟁이 터져 한 학년을 제대로 다니지도 못한 채 피난을 갔다. 이후, 글 배울 시간도 없이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논밭에서 일했고, 21살 때 결혼해 2남1녀를 낳았다. 이후, 할머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함께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공사장, 식당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저축을 하거나 건강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벅찼다. 그러다, 당뇨병을 앓던 할아버지가 합병증으로 '실명' 판정을 받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병수발에 가장 역할까지 해야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해도 비싼 약값에 세 자녀 교육비까지 혼자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러다 생각한 게 '김밥' 장사였다. 품은 많이 들어도 나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요가 많고 공급이 적은 영남대에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영남대 주변에는 번듯한 식당이나 편의점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캠퍼스를 바라보며 40년 세월을 되새기는 할머니(2013.3.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캠퍼스를 바라보며 40년 세월을 되새기는 할머니(2013.3.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70-80년대에는 대학생들의 시위와 이를 진압하는 경찰의 최루탄 연기 속에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김밥을 팔았다. 대야를 이고 가다 군인에게 붙들려 심문을 당하고 곤봉에 맞은 적도 있다. 그래도 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학기 중에는 김밥을 팔고, 방학 기간에는 식당, 공장, 공사장 등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영남대 중앙도서관 신축공사장에서 못을 뽑고 잔디를 심은 적도 있다. 

"김밥 팔면서 별일을 다 겪었지. 학생들 맨발로 경찰에 붙들려 가는 것도 보고 최루탄 연기에 버스타고 가는 내내 운적도 있고. 그 세월 말한다고 누가 보상해주고 알아주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내 일에 당당해. 손주가 이 학교에 다녀서 내 이름을 알려주지 못하지만 그 녀석도 나를 자랑스러워 할 걸?  어떻게 보면 나는 이 학교 산증인이잖아" 할머니는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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