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짜꿍 언론권력, 업보 치를 날 멀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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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칼럼] "권력 앞잡이 노릇, 윤전기 불지른 4.19 울분을 잊었는가"

    
 4.19가 나던 1960년에 나는 대학 1학년이었다. 입학 후 한 달 남짓 만에 엄청난 사태가 일어났으니, 대학 초년생에게는 시위에 앞장서고 말고 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나 독재에 저항하는 물결이 파도치던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 어쩌다 있었고, 그런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약간의 행운이었다.

 그날 인파에 떠밀려 서울 광화문 네거리의 군중 속에 섞여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간간이 박수를 치기도 했던 것 같다. 오후 세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경찰파출소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땅바닥에 엎드리더니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내 옆에 서있던 고교생 한 명이 머리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겁에 질려 몇 걸음 도망치던 나는 되돌아와 다친 학생을 끼어 안고 가까운 의원으로 달려갔다. 의원에는 벌써 다친 사람들로 가득했고, 배에 관통상을 입은 어떤 청년은 엄청나게 많은 양의 창자를 병실 바닥에 쏟아놓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내가 애써 데리고 간 고교생은 입술이 파랗게 변한 채 이미 숨이 끊어진 듯했다. 작은 개인병원의 의료진은 어느 환자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었다. 말 그대로 황당한 현장이었다.

 아수라장의 병원을 나와 시위대와 군중이 뒤범벅이 된 세종로 떠밀려 가다가 불이 난 어느 건물에 이르렀다. 호기심에 가까이 가 봤더니 S신문의 윤전실 쪽에서 연기가나고, 신문용지 뭉치들이 마구 나뒹굴고 있었다. 정부기관지 노릇을 해온 신문사에 시위대가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신문사 앞의 파출소에는 경찰관들이 모두 피신을 했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4 ․ 19에 얽힌 여러 가지 기억 가운데, 총에 맞아 숨진 고교생과 불타던 윤전실의 모습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죽은 고교생은 운이 없어 횡액을 당한 것이지만, 불에 탄 윤전기의 경우는 불교식 표현을 빌자면 업보에 의한 것이다. 정부의 기관지로 위세를 떨치던 신문사에 시위대가 난입하여 윤전실에 불을 지른 것은 쌓이고 쌓였던 울분의 폭발이었던 것이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 요즘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감시견역할이 주된 기능이어야 할 언론이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자임한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자성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스스로 권력기관이라도 된 듯 기고만장이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의식수준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듯, 한 나라의 언론도 국민의 수준을 뛰어넘기가 어렵다. 아직도 메이저로 군림하고 있는 상당수 언론의 억지주장은 집권당의 논조를 빼닮았다. 인터넷이나 SNS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면 우리국민의 의식은 아직도 한심한 ‘졸부’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찔해진다.

 젊은 층은 더 이상 종이신문이나 TV에 정보를 의존하지 않는다. 더구나 재래식 매체가 집권층의 로비에 의한 의도적인 조작을 한다거나,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아직도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는 기성세대들은 띄엄띄엄 눈에 띄지만, 신문을 들고 있는 젊은 층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가뜩이나 뉴미디어에 밀려나고 있는 종이신문이 이제 늙은이들의 전유물로 남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징표의 하나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윤전기는 구태여 불태울 가치도 없는 고철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정권의 하수인 노릇하며 언론권력으로 건재를 과시하는 올드 미디어들의 거드름도 머잖아 빛이 바랠 것이다. 꼼수 논조가 계속 통하지는 않을 수준으로 우리 사회가 하루하루 성숙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신문 구독자들이 알다시피 몇 개월 구독료를 안 받는 신문은 수두룩하고, 한 신문에 다른 신문을 무료로 끼워주기도 한다. 어떤 메이저 신문들의 경우 아예 6개월 이상 구독하면 돈을 주겠다고 현금이 뾰족이 나온 봉투를 들고 다니는 사례도 없지 않다. 신문은 확실히 위기의 계절을 맞고 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령인구는 벌써 600만명을 넘어섰고, 2014년 말이면 7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65세 이상 고령자가 전체인구의 14%에 이르는 ‘고령사회’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령인구가 이렇게 불어난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세력 쪽에 유리하다고 보는 것은 오산이다. 새로 노년층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신노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 세대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인터넷도 하고 스마트폰과도 친하며, 언론의 논조를 제대로 비판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올드 미디어의 수명을 위협하는 것은 뉴미디어의 눈부신 발전이 주된 원인이겠다. 하지만 그에 못잖게 신뢰상실에 따른 시민대중의 외면 탓도 크다고 봐야 한다. 신뢰를 잃은 매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시장논리가 미디어 시장에서도 통용된다고 봐야 한다. ‘업보’나 ‘인과응보’ 같은 진리는 특정 종교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김상태 칼럼] 24
김상태 / 언론인. 전 영남일보 사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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