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항쟁, 73년의 한(恨)...유족들 "특별법 제정, 대체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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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등 120명 가창댐서 합동 위령제
"진실규명·명예회복 위해 특별법 제정...국가는 희생자들과 유족에 사과"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단상을 내려오면 눈물을 흘리는 채영희 회장(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단상을 내려오면 눈물을 흘리는 채영희 회장(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너는 꼭 살아라, 살아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얘기하고 알려라. 어머니 말씀에 나이 80이 다 되는 지금까지 살아서 아버지 죽음을 외치고 있지만 아직 국가 사과를 받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평생을 '빨갱이' 아낙으로 살다 가신 어머니. 그 한을 풀어야 제가 두 분을 뵐 수 있다."

채영희(75) '10월항쟁 민간인희생자 유족회' 회장의 말이다. 채 회장의 부친 고(故) 채병기씨는 지난 1946년 "쌀을 달라"며 대구 10월 항쟁에 가담한 이후 73년이라는 세월 동안 소식이 끊겼다. 4살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어느덧 일흔이 넘었다. 채 회장은 "국가는 억울한 죽음에 책임을 지고 사과해야 한다"며 "이제라도 특별법을 제정해 진실규명하고 돌아가신 이들의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 10월 항쟁 73주기·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69주기를 맞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10월항쟁민간인희생자유족회'는 1일 달성군 가창댐 수변공원에서 이성번 한국전쟁정상화추진위원회 사무국장 사회로 2시간 가량 '10월항쟁73주기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69주기 합동위령제'를 열었다. 종교 의례에 이어 전통 제례, 진혼무와 추모식, 헌화 순서로 위령제는 진행됐다. 유족들은 고인들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창댐을 향해 그리운 가족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눈물 지었다.

채영회 회장·김영호 부회장, 오원록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고문, 김하종 경주유족회장, 권진영 군위민간인희생자 회장, 강창덕 4.9인혁재단 이사장,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김태일 218안전문화재단 이사장, 김영애 대구시 시민행복교육국장, 최봉태 변호사 등 120여명이 참석했다.

위령제에서는 유족들의 애틋한 사연이 줄을 이었다. 문영군(75)씨의 형은 한국전쟁 때 농사를 짓다가 낯선 남자들에게 불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였다. 형은 결혼 한 지 5개월이 채 안 된 22살의 젊은 청년이었다. 박서연(73)씨는 6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한국전쟁 때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아버지는 낯선 남자들이 찾아와 따라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사라진 영문도 알 수 없었다. 어린 딸 셋을 두고 남편을 떠나보낸 어머니만 눈물로 지새웠다. 박서연씨는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실 때 국가의 사과를 받아 그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고 했다.

위령제에 참석한 유족과 시민들이 헌화 중이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위령제에 참석한 유족과 시민들이 헌화 중이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합동 위령제에서 묵념 중인 유족과 참석자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합동 위령제에서 묵념 중인 유족과 참석자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가창댐은 민간인 희생자 8천여명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가창댐은 민간인 희생자 8천여명이 묻힌 곳으로 추정된다(2019.10.1) / 사진.평화뉴스 한상균 수습기자

김태일 218안전문화재단 이사장은 "해방 후에도 민중이 기대한 세상은 오지 않았다. 생활은 불안했고 미군정 식량정책은 절망을 불러왔다"며 "10월항쟁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정당한 저항"이라고 했다. 오원록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고문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권고사항은 이행되지 않았다. 국가기관 사과도 없었고 역사 기록 수정, 피해자 추가 조사, 유해 발굴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해방 전후 현대사의 쟁점은 분단과 항쟁, 민간인 학살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대구시는 지난 2016년 10월항쟁 위령사업 지원조례를 제정했다. 유족들은 매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8천여명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가창댐 인근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오는 2020년에는 가창댐 인근에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진다. 하지만 2017년 3월 9일 이개호 의원(더불어민주당) 등 국회의원 11명이 발의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기본법안'은 3년째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때문에 유족들은 "조속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해방 직후 1946년 대구 시민들은 미군정의 친일 관리(官吏) 고용·식량공출 시행을 비판하며 같은 해 9월 총파업을 벌였다. 10월 1일부터 쌀을 달라며 항쟁을 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진압했다. 10월항쟁 가담자·국민보도연맹원·대구형무소 수감자 등은 한국전쟁 전후 군경에 의해 달성군 가창면·경산 코발트광산·칠곡 신동재 등에서 집단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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