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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칼럼] 동아조선 100년...대학신문 역사서가, 지역신문 역사서가 오늘따라 빛나 보인다


 1974년 봄 ~ 1975년 봄, 경북대학보사 기자를 했던 나는 그로부터 30여년 지난 2008년 『경북대신문50년사』 편찬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유신정권은 조금만 유신체제에 거슬리면, 조금만 ‘언론자유’를 목말라하면 탄압했다. 그런 시절을 누군들 떠올리고 싶으랴. 더구나 1975년 3월, 학보사기자 18명은 대학의 사사건건 삭제요구에 반발하며 끝내 학기 첫 신문을 펴내지도 못하고 편집국에서 ‘대학언론자유실천선언대회’라는 긴 이름의 성명을 발표하고 옥쇄하였고 이내 파면 또는 해임되고 말았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었다. 정권은 인혁당(재건위)사건을 만들어 대구의 선량한 지식인들에게 씌웠고, 경북대 여정남 열사도 학생신분으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

 1952년 창간한 경북대신문은 50주년을 훨씬 넘긴 56주년에 50년역사서를 발간하게 됐다. 탄압의 시대를 겪은 자들이 선뜻 기록정리에 나서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초창기 이후 대학신문을 보통 ‘학보’라고 불렀다. 1956년경 이승만 정권 때 대학마다 발간하는 신문을 ‘신문’이라고 칭하자 권력은 “대학에서 나오는 게 무슨 신문이냐, 학보이지.” 그래서 서울대만 빼고 전부 ‘학보’라고 통일하였다는 독재와 상통하는 얘기가 ‘학보’ 선배들을 통해 내려온다.

경북대신문 50년사 / 사진. 유영철
경북대신문 50년사 / 사진. 유영철

시간은 가고, 참여하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이 영인본을 들추어 나갔다. 그런데 내가 맡은 ‘고정칼럼을 통해본 50년의 발자취’를 준비하면서 놀라운 자취를 발견했다. 경북대신문의 주칼럼인 <첨성대>는 독재에서 민주로, 군부정권에서 민주정권으로, 시대가 바뀔 때 지난 시대의 언론의 잘못을 성찰하고 통회한 내용을 지면에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뒤에도 그렇게 했고, 10.26으로 박정희 정권이 쓰러진 뒤에도 4.19정신을 가다듬으며 그렇게 했고, 전두환 정권이 넘어간 뒤에도 언론통제 속에 펴냈던 신문을 훑어보고 과오를 지적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졌던 것이다. 대학언론이 몸부림을 치더라도 대학언론마저 탄압하는 권력에는 맞설 수 없는 한계 속에 때로는 행간으로 알리고 때로는 정간으로 버티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언론의 사명을 못다 한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자기과거 성찰, 이것이 대학의 힘이구나! 이런 성찰이 있음으로써 대학은 명징하게 전진할 수 있구나! 과거를 물려 받은 후배들이 과거의 선배들의 잘못을 대신해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 그러한 활자들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검색해보지는 않았지만 전국 대부분 대학신문들의 역사서의 집필자세가 이러할 것으로 짐작한다. 바람직한 언론현상이다.
 
 내가 몸담았던 영남일보는 1995년 창간 5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50년사』를 펴냈다. 영남일보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0월 11일 창간된 대구경북의 지역신문이다. 갑자기 해방이 된 마당에 한글이 어디 준비돼 있었으랴. 신문을 만들어본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일제하 지역신문은 일본어로 된 ‘대구일일신문’이 전부였었다. 이제까지 못해본 꿈같은 우리글로 된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고자 13명의 동인들은 열정을 쏟았다.

<영남일보> 지령 1천호, 1948년 11월 10일자 신문
<영남일보> 지령 1천호, 1948년 11월 10일자 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이미 1940년 폐간되고 말았기에, 일본어 신문에 종사하며 일제를 수식하던 기자밖에 없었다. 경성일보 조선상공신문 기자 등 이들 일제하 일본어신문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영남일보를 창간하면서 만든 창간사를 읽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에 입사한 나는 2년만에 통폐합을 겪었다가 다시 돌아온 후 입사 17년만에 『50년사』를 통해 영남일보 창간사를 처음 접했던 것이다.

 “ ... 과거 일본제국주의 압정하에 충식(蟲息)의 생명을 계속하려고 협소(狹少)한 자아에 몰각(沒却)하여 익찬총독정치(翼贊總督政治)에 주구적(走狗的) 행동과 함께 필첨(筆尖)으로서 동포대중을 위만(僞瞞)하며, 아름다운 우리 동포의 민족성을 해독(害毒)으로서 전파(傳播)시킨, 미균제조자(黴菌製造者)의 일역(一役)을 감히 행한 우리 과거 신문인(新聞人)의 죄상(罪狀)을 양심적으로 삼천만동포(三千萬同胞) 앞에 업대여 엇뜨한 규탄(糾彈)과 질책(叱責)을 바들 용의가 잇음을, 여기에서 참홰의 눈물을 머금고 새삼스럽게 맹서(盟誓)하여 두는 바임이다.”

 영남일보 창간 주역들은 과거 일제의 주구가 되어 동포를 속이고 민족성을 해독으로 전파시킨 ‘세균 제조자’라고 죄인시하며 규탄과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참회하는 것이었다.  그 참회는 참으로 보기드문 아름다운 것이었다. 영남일보가 그때 크게 참회를 했다고 해서 그 후에 참언론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다른 신문들의 역사서를 검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역신문의 역사서의 자세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다. 

 일제하 민족언론 동아일보는 1920년 4월1일 창간되었고, 조선일보는 이보다 한 달 가량 빠른 3월 5일 창간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두 신문은 올해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 조선일보는 『민족과 함께 한 세기(1920-2020) 조선일보100년사』를 발간했다. 창간 100주년 특집으로 지난 3월 5일자에 ‘조선일보 100년을 만든 33인’을 싣기도 했다. ‘남궁훈 박종화 이상재 현진건 신석우 한기악 안재홍 …’ ‘별 같은 논객과 문인들’이 즐비했다.

<조선일보> 2020년 3월 4일자 10면(특집)
<조선일보> 2020년 3월 4일자 10면(특집)
<조선일보> 1936년 1월 1일 1면. 일왕 부처를 전면에 올리고 칭송하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같은 면에 이 기사를 올렸다.
<조선일보> 1936년 1월 1일 1면. 일왕 부처를 전면에 올리고 칭송하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같은 면에 이 기사를 올렸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자세는 보이지 않고 있으며, 동아일보는 아직 20일 가량 남아있으나 반성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조선일보는 3월 4일자에 ‘과거의 오류, 사과드리고 바로 잡습니다’라고 공지하면서 특집으로 한 면을 할애하여 지난 1986년 11월 16일자 ‘김일성 사망’ 등 주요 오보를 정정하고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황폐하 찬양’과 같은, 오보가 아닌 왜곡된 기사에 대한 통찰과 반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제 독자들은 동아조선이 과거 무엇을 했는지 잘 알게 되었다. 매거하지 않아도 당사자들도 물론 알 것이고 종사자들도 알 것이다. 100주년을 맞아 신문사 앞에서 역사 청산을 바라는 시위가 이들 신문에 몸담았던 종사자들에 의해 열리고 있다. 100년 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한번 되돌아보고 조금이라도 허물이 있으면 씻고 넘어가기 위해 반성하는 면모를 보였으면 좋으련만, 과거에 대해서는 조금도 할애되지 않는 지면을 보면 씁쓸해진다.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선배들은 가고 없지만 남아서 대를 잇는 후배들은 스스로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는가. 기회는 100년 만에 온 것이다.
 대학신문 역사서가, 지역신문 역사서가 오늘따라 빛나 보인다. 







[유영철 칼럼 22]
유영철(兪英哲) / 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언론정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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