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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받들어 모셔야 할 '급'은 누구인가
[오택진 칼럼] "남북, 지금이라도 '역지사지' 존중과 양보로 대화에 다시 나서야"
2013년 06월 17일 (월) 10:03:41 평화뉴스 기자 pnnews@pn.or.kr

 2007년 10월 3일 점심. 2007 남북정상회담 일정 진행 중 오전에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을 마친 노무현 대통령은 남측수행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측이 신뢰를 가지고 있더라도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불신의 벽을 좀 더 허물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다…….예를 들면 개혁과 개방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신감과 거부감을 어제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면담, 오늘 김 위원장과의 회담에서 느꼈다…….우리는 개성공단을 '개혁과 개방의 표본'이라고 많이 얘기했는데, 우리식 관점에서 우리 편하게 얘기한 것이 아니었나. 북측이 볼 때 역지사지 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개성공단의 성과를 얘기할 때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는 용의주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북한의 최고위 지도부와 회담을 진행한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가 ‘선의’로 북한의 개혁 개방을 주장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달리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말인 것이다. 남북대화 60년의 과정에 가장 큰 교훈은 ‘존중’에 기초한 ‘역지사지’의 정신인 것이다. 최근의 남북당국대화를 둘러싼 모습에서 다시 새겨보는 교훈이다.

 심각했던 한반도의 긴장국면을 겨우 넘긴 상황에서의 북한 조평통의 남북대화 제의는 반가웠다. 우리 정부의 과감한 장관급회담 제의와 실무접촉까지는 마치 물밑 접촉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순조로운 듯 보였으나 결국 ‘남북당국대화’는 무산되었다. 회담 결렬의 원인이 된 양측 회담 대표의 ‘급’의 문제에 대해서 남과 북의 주장이 엇갈린다. 북측 수석대표인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 국장이 장관급이냐, 차관급이냐, 국장급이냐를 가지고 논란이 분분하다. 남과 북이 체제와 권력구조가 달라 쉽게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남북 당국 간의 회담 전례가 있는 상황에서 이를 존중하고 연장선상에서 따져봐야 할 문제다.

현 정부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처럼 굴욕적으로 회담을 하지 않겠다고 강변하지만 이 또한 일방적 주장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의 남북관계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회담의 ‘급’과 ‘격’에 대해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며 굴욕적으로 진행했다는 것은 하등의 근거가 없다. 그동안의 남북회담 역사를 보건대 북한의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급이 우리의 통일부차관과 대화 파트너를 해 온 것이 전례였다. 이에 따르면 조평통 서기국 국장은 장관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명칭이 남북당국 회담으로 변경되었다 하더라도 회담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보면 현 정부가 이를 존중해주는 것이 옳았다. 우리 정부가 회담대표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북측의 판단에 맡길 일이었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새로운 정책을 내걸었고 이에 따라 모든 부분에서 이전 정부와 다르게 해야 되겠다는 것도 이해되지만 이전 정부의 남북회담의 역사와 과정을 깎아 내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 <한겨레> 2013년 6월 12일자 3면

 서로간의 회담대표의 ‘급’을 맞추는 문제와는 별개로 과연 이 문제가 사태의 본질인지는 의문스럽다. 남북당국회담의 무산 이후 남북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북한은 우리 정부의 회담의지 자체를 문제 삼았고, 우리 또한 북한의 억지주장에 단호하게 대응한다는 입장이다. 통일부의 주장처럼 남북회담대표 명단 교환 후 북측이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였고 우리 측은 대표 교체 의사가 없었고 이에 북측이 그렇다면 회담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북측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자기 대표보다 한 급 낮은 우리 통일부차관과는 회담을 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급’이 맞지 않다고 교체 제안을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상황이라면 상호 교환한 대로의 대표 명단으로 회담을 진행하는 것이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관계를 위해 더 좋은 일이 아니었을까? 회담대표간의 ‘급’을 맞추는 문제가 외교관례상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존중을 의미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오랜 기간 단절된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 차원에서 남북 모두 ‘양보’의 미덕을 왜 발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서로가 ‘진정성’과 ‘대화의지’를 말하기엔 지난 5년의 남북관계는 최악이었다. 대화의 성사를 위한 통 큰 양보는 대의를 위한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는데 남북 모두 유감이다.

 남북 당국자들이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자존심을 지켰는지는 몰라도 남북이 의제로 삼고자 한 개성공단 정상화, 금강산 관광재개, 이산가족 상봉, 6.15 공동선언 이행 등의 문제는 더욱 더 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매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에 걱정인 우리 기업들, 졸지에 좋은 일자리를 잃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는 5만4천명의 북한 노동자들, 언제 삶을 마감할지 모르는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남북당국회담의 대표들이 받들어 모셔야 할 더 높은 ‘급’이 아닌가?

 나는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바라지 않는다. 자칭 진보라 분류하는 나는 통칭 보수 정치세력의 후보로 나서 당선된 박근혜 정부가 그 나름의 한계 내에서라도 노동, 인권, 복지, 평등, 평화, 통일 등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되는 공약과 정책에 있어서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자신이 속하지 않거나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 집권했다고 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본다면 제대로 된 국정을 펼쳐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특히나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남북관계에서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기대한다. 개혁진보적인 성향의 정부가 남북화해 교류협력 정책을 펼 때는 ‘퍼주기’다 뭐다 반발이 많겠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정부가 남북화해 협력정책을 펼 때는 내부의 반발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북한이 오랜만에 ‘비핵화’를 언급하며 미국에게 고위급회담을 제안했다. 지난 번 우리에게 남북대화를 제안했던 것과 비슷한 배경으로 이번에도 미국에게 공을 넘겼다. 북미 대화의 전망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적어도 하나 분명한 것은 남북대화 없는 북미대화보다 남북대화 있는 북미대화가 더 좋다는 것이다. 남북당국이 지금이라도 ‘역지사지’의 존중과 양보로 대화에 다시 나서기를 촉구한다.

   




[오택진 칼럼] 14
오택진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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