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정치적인 '정교분리'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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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치료거부한 동산병원, 일제 종교인 '방면위원'...


응급치료만 하면 소생할 소아의 치료를 거절  
◇ - 거절한 리유는 이날이 안식일 / 대구동산의원의 처사

「너희가 안식일에 소나 양이 움울에 빠지면 구하지 안켓느냐 더욱 사람이랴」 함은 예수ㅺㅔ서 친히 말슴하시고 가라치신 바이다 이 교훈을 밧아 뎐하는 구미인(歐米人)들이 선교사로 올 ㅼㅐ에 역시 가튼 사명을 가지고 의료긔관(醫療機關)ㅺㅏ지 경영하게 되는 것이다 대구에도 역시 그들이 경영하는 동산병원(東山病院)이 잇는데 지난 십칠일 오후 령시 삼십분경에 대구부 남산뎡 백남채씨 토관공장(白南採土管工場) 前 웅덩이에 남성뎡(南城町) 팔십일번디 림칠룡(林七龍)의 아들 일수(日秀)(一一) 보통학교 삼학년생이 동모들과 가티 목욕하다가 물에 ㅽㅏ저 죽게 됨을 그 부모가 듯고 즉시 달려가서 신톄를 건저 동산병원에 응급치료를 청한바 동산병원에서는 『오늘은 주일임으로 도저히 치료할 수 업다』하고 거절함으로 사람이 죽는데 치료를 아니하야 준다 함은 넘우 심한 일이라 하며 승강이하는 중 시간이 넘우 길어저서 응급치료도 못하고 죽이여 버린바 근방에 사는 인사들은 동산병원의 행동이 너무 해괴하다고 비난이 자자한 모양이라더라【대구】


<중외일보> 1928년 6월 21일 2면 3단 기사 「응급치료만 하면/소생할 소아의 치료를 거절/거절한 이유는 이날이 안식일/대구 동산의원의 처사」
<중외일보> 1928년 6월 21일 2면 3단 기사 「응급치료만 하면/소생할 소아의 치료를 거절/거절한 이유는 이날이 안식일/대구 동산의원의 처사」

이 기사는 1928년 6월 21일 중외일보 2면에 3단으로 실린 기사입니다. 머리기사가 3단이므로 이 기사는 뉴스 밸류가 머리기사와 진배없다고 보면 될 듯 합니다. 이 기사를 요즘 신문 철자법으로는 다음과 같이 옮겨 적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안식일에 소나 양이 우물에 빠지면 구하지 않겠느냐. 더욱 사람이랴」함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바이다. 이 교훈을 받아 전하는 구미인들이 선교사로 올 때에 역시 같은 사명을 가지고 의료기관까지 경영하게 되는 것이다. 대구에도 역시 그들이 경영하는 동산병원이 있는데 지난 십칠일 오후 영시 삼십분 경에 대구부 남산정 백남채 씨 토관공장 앞 웅덩이에 남성정 81번지 임칠룡(林七龍)의 아들 일수(日秀)(11) 보통학교 3학년생이 동무들과 같이 목욕하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됨을 그 부모가 듣고  즉시 달려가서 신체를 건져 동산병원에 응급치료를 청한바 동산병원에서는 『오늘은 주일이므로 도저히 치료할 수 없다』하고 거절하므로 사람이 죽는데 치료를 안해준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라고 하며 승강이하는 중에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응급치료도 못하고 죽여 버린바 근방에 사는 인사들은 동산병원의 행동이 너무 해괴하다고 비난이 자자하다.【대구】

아이가 죽는데도 '치료 안 된다'

임일수 어린이가 웅덩이에서 동무들과 함께 멱을 감다가 빠졌는데 그 소식을 듣고 그 부모가 웅덩이에서 멀지 않은 동산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기자는 이 대목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대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이었고 미국 선교사들은 여기에 의료기관을 세웠는데 기자는 의료기관을 세운 목적이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고상한 뜻을 실천할 것으로 기대했던 미국 선교사들(의료진)은 “오늘은 거룩한 주일이므로 사람이 아무리 위중한 지경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치료해줄 수 없습니다.”고 임일수 어린이의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아이의 생사가 하도 급해 일 분 일 초를 다투는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그 부모들은 “아이는 살리고 봐야 할 것 아니냐.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매달렸고 선교사들은 계속 거부했으며,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임일수 어린이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한 송이 꽃으로도 미처 피어나지 못한 열한 살 어린이. 응급치료만 하면 살릴 수 있는 어린 생명이 위경에 빠졌는데도 이 땅에 선교하러 왔다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교리를 내세워 외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외일보 기자가 보도한 이유-생명은 무엇보다 귀중한 것이란 가치관-가 과연 외면당해야 하는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말 못하는 짐승-양도 우물(웅덩이)에 빠지면 건져내려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하는 성경 읽기가 잘못 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구에 온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기관인 동산병원의 의료선교사들은 생명보다 더 중한 것을 내세워 임일수 어린이 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개신교계에서는 미국 북장로교가 근본주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해석이나 시각은 같은 대륙이면서도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당시에도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선교구역이 민족 운명 막아


문제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을 누가 결정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결정했습니까? 선교사들끼리 조선 팔도를 나눠 결정했는데 황해·평안도와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으로 나눠진 것 아닙니까? 선교구역을 나눈 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요? 선교구역을 나눌 즈음에 이등박문과 한국(조선)에 와 있던 개신교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합의했습니다. 선교사대표와 이등박문이 맺은 협정입니다. 내용은 ‘조선에 대한 정치상의 권리는 일본이 행사하고 선교사들은 도의상의 지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교분리’ 협정에 따라 선교사들은 대한제국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 의병전쟁에 투신할 때 문명국 일본의 지도를 받는 것이 조선 사람의 도리라고 하면서 의병항쟁을 막아버렸습니다. 정치적이다 못해 너무나 정략적인 ‘그들만의 결정’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자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우리의 운명은 이미 이때 막혔습니다. 외세의 지배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 땅에서 시작됐습니다.

선교사들, 안중근 의사를 어떻게 봤을까

엊그제 중국 하얼빈 역두에서는 이등박문을 향한 안중근 의사의 저격 거사 시간(오전 9시 30분)에 맞춰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 행사가 열렸습니다. 군국주의 일본의 시각에서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럼 ‘정교분리’에 따라 일본의 정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한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장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에게 안중근이 의사(義士)로 비쳤겠습니까?

<한겨레> 2014년 1월 21일자 2면(종합)
<한겨레> 2014년 1월 21일자 2면(종합)

삼일운동 막아선 '자제단'
 
동산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간 임일수 어린이가 빠진 웅덩이는 대구 남산정(남산동) 백남채토관공장 앞에 있었습니다. 백남채는 대구 삼일운동(대구에서는 삼일운동이 3월 8일에 시작됐습니다)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계성학교 교사 이만집(이만집은 삼일운동 주동자로 체포돼 옥살이를 했고 감옥에서 나온 뒤 남성정교회(현재의 제일교회) 목사가 됐습니다)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대구의 삼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대구 삼일운동의 주도세력은 아니었습니다. 훨씬 더 많은 학생들, 농민, 상인, 노동자들, 여성들이 대구의 삼일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대구에서는 불교 쪽에서도 많은 스님들과 청년들이 참여했습니다. 반면 한 쪽에서는 삼일운동은 자제돼야 한다면서 대구의 유지들이 ‘자제단’을 식민지 조선에서 맨 먼저 결성해서 만세운동 방해작업에 나섰습니다. 대구읍성을 파괴해 일본거류민단이 대구사람을 휘어잡고, 대구의 돈줄을 거머쥐도록 한 대구군수 박중양이 그 중심인물이었습니다.

‘미디어창’은 대구의 애국운동인 삼일운동 주동자들, 조직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민족정신으로 참여한 것으로 자랑스러워합니다. 자제단에 욕설을 퍼붓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 헌병경찰에 맞선 청년들을 응원한 서문시장 상인들 또한 길이 기념돼야 할 분들입니다. 학생지도자들 가운데는 『씨 뿌린 사람들』을 쓴 시인 백기만도 들어 있습니다. 소학생들도 어리다고 만세운동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1920년대 말~1930년대에 대구 연극·영화운동을 주도한 영천 출신 이원식(화가 이인성의 동무였습니다)은 소학생으로 만세를 부르다 모진 욕을 당했습니다.

'방면위원'된 유지들

‘미디어창’은 여기서 일제강점기 대구부(대구시)에서 1943년 발행한 문서 한 장을 정리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문서의 제목은 「방면위원 처리세목 및 취급수속개요」(方面委員處理細目並取扱手續槪要)입니다. ‘방면위원’은 대구의 유지급 조선인들과 일본인들로 구성됐습니다. 맡은 임무를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조사
   1. 생활조사표의 작제 및 정리 /  2. 조사표급(票級)세대
2. 상담·지도
3. 타풍(惰風)의 교정
4. 보호구제
   1. 유소년 보호 /  2. 노·고자(老·孤者) 보호 /  3. 피학대자 보호 /  4. 기아·미아 및 행려병인 보호
   5. 정신병자의 보호 /  6. 이재자 보호 / 7. 석방자 보호  /  8. 나환자 및 중독자 보호 /  9. 금품 급여
5. 보험 급여
   1. 시료취급 /  2. 방역취급 / 3. 종두의 여행
6. 주선소개 
   1. 차가차간 소개 /  2. 직업소개 / 3. 부업소개 / 4. 호적정리


겉보기엔 마치 오늘날 사회복지사업 항목 같습니다만 당시 일제는 대부분 조선인을 요시찰 대상으로 다뤄 조선총독부가 제공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강제함으로써 농민들은 총독부가 쌀농사를 지으라면 지어 일본에 식량으로 제공하고,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고, 노동력도 징용이다, 정신대다 해서 법령을 내세워 무진장 공짜로 제공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만주가 낙원이다 하면 만주로 가야 했고, 대신 농민들이 떠난 터전은 일본사람들이 차지해버렸습니다.

일제강점기 대구부가 1943년 발행, 시행한 「방면위원 처리세목 및 취급수속개요」(부분-처리세목, 방면위원 명단)
일제강점기 대구부가 1943년 발행, 시행한 「방면위원 처리세목 및 취급수속개요」(부분-처리세목, 방면위원 명단)

이웃사람 운명을 '쥐락펴락'

도회지에는 어디나 정 총대란 조직을 만들어 뉘 집 숟가락이 몇 개이고,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샅샅이 조사하는 일을 수행하게 했는데 뉘 집 딸을 정신대로 보낼 것인지, 뉘 집 아들이나 뉘 집 가장(남정네)을 징용에 보내고 학병으로 끌어갈 것인지 등 생사여탈권은 일차로 정 총대의 손에 달렸습니다. 대구 삼일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백남채 역시 정 총대로 변절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한 때 의성에서 기독교 농민운동을 전개했던 남성정 교회 유재기 목사 등은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개신교 신사참배를 적극 주도하며 친일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정교분리’가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현제명은 ‘제국의 음악가’로 일본왕 만세를 음악으로 주도했고, 김생려, 박태준 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화여전 김활란도 마찬가지였죠.

'인간개조' 앞잡이

방면위원 임무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상담지도」입니다. 대구부윤(대구시장) 명의의 이 문서에는 ‘상담지도는 방면사업 가운데 가장 어려우면서도 해당 사업의 골자라고 할 만큼 중요한 사업이라면, 위원은 항상 이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시의에 따라 적당한 처치를 강구하여 그 지도를 적의하게 할 것. 그리고 그 취급하는 사건의 내용은 직업, 생활, 교육, 호적, 분쟁, 법규에 관한 사항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모든 일(인사 백반)에 걸치며 그 번잡한 것 도저히 상상을 넘어서므로 위원의 노력, 고심을 요하는 일이 극히 많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권력을 조선 사람의 모든 일에 간섭해서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석방자 보호」 항목을 보면 방면위원의 임무가 군국 일본에 방해되는 조선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석방자에 대하여서는 친족 근린 등이 이(석방자)에 대한 태도 및 본인의 사상행동에 유의하여 항상 대구상성회 직업소개기관과 연락하여 개과천선의 열매를 거둘 것.’

일제가 모든 권력 맡겨

석방자에 대해서는 가까운 사람은 물론 본인의 사상행동에 유의하여 ‘개과천선’ 시키라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개과천선’은 일제의 종, 로봇노릇을 하도록 ‘인간개조’하라는 것입니다. 일본 본토에서도 일제 특고(特高)는 좌익요시찰인, 앞서가는 우익(선예분자),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평화를 희망하는 민중, 내사 중인 사람들, 연행(강제 동원한) 조선인·중국인 등에 대해 ‘여론’을 내세워 특히 엄중하게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제는 조선인과 일인 유지들에게 그 단속의 첨병을 맡긴 것입니다. 대구부가 임명한 방면위원 중에서 조선 사람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창씨개명으로 파악하기 곤란한 사람은 포함하지 않음. 주소와 연락처도 생략).


눈에 띄는 종교인 방면위원

방면위원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종교인들입니다. 그것은 아마 일제가 종교인들 뒤에는 많은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종교인들을 통해 신자들을 황국신민으로 동화시키는 게 보다 쉽고 빠르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상화 시인의 명단이 방면위원에 포함된 것도 눈에 띕니다. 이상화 시인은 이 문서가 시행된 1943년에 서거하기 때문인데 여태 발표된 이상화 시인의 어떤 문학연보에도 이 대목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힐 것은 이 자료는 동산의료원, 제일교회 등 기독교 관련 각종 연사(年史)를 꾸준히 집필, 발표해온 이재원 장로님이 발굴한 것으로서, 모 인사가 이 장로님(최근 서거)한테서 이 자료를 빌려다가 번역, 출판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번역 자료집을 읽은 독자가 한 두 분이 아닐 테고, 번역된 지도 조금 됐습니다. 이상화 시인은 이 자료를 대구부에서 반포, 시행할 때는 이미 중병상태였으며 이내 서거한 것으로 봐 일제가 혹여 이상화 시인의 명의를 도용한 것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매일신문, 서상돈 주위에서만 맴돌아

<매일신문> 2014년 1월 10일자 1면
<매일신문> 2014년 1월 10일자 1면
‘미디어창’은 언론비평의 장입니다. 대구의 근현대 역사와 관련해 매일신문은 2014년 1월 10일치 1면에서 「창고 돼버린 서상돈 고택」을 다뤘습니다.

부산 동래 상무소에서 한말 최초로 발기, 발의한 국채보상운동을 이어받아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은 국내 곳곳은 물론 연해주 등 해외에까지 파급된 사실에서 한계는 있을망정 주목받아야 할 민족자주운동입니다. 동학혁명과 함께 선구적인 민족자주운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운동에 앞장 선 분이 대구 광문회 사장 김광제(의병 출신)였고, 그 아래 서상돈이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미디어창’은 이미 ‘미디어창’ 언론모니터/비평을 통해 의미와 한계, 특히 언론이 사실 보도, 균형 보도해야 할 것을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대구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맥락과 편향」(2013. 2. 26), 「지역주의에 빠진 국채보상ㆍ문화인 보도」(2013. 2. 12.)).  
 
김광제는 제2의 삼일운동을 기획, 주도하다 마산에서 순국했습니다. 그런데 매일신문의 이날 보도는 여전히 서상돈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대구 국채보상운동 도중에 손을 뗀 서상돈에 대해 대구의 초창기 일본거류민단 간부 출신 가와이 아사오(대구에서 발행된 조선민보 사장)는 『대구물어』(대구이야기)에서 한말 일본 화폐를 유통시키는 사업(일본경제권의 확대)에 서상돈이 어떻게(그리고 얼마나 적극적으로) 가담했는지 실상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만세 부르다 변절

<매일신문> 2014년 1월 1일자 38면(오피니언)
<매일신문> 2014년 1월 1일자 38면(오피니언)
대구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에 속했고, 그 의료선교기관인 동산병원을 휘감아 돈 가치관이 어떤 것이었는지 임일수 어린이 사망 사건으로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은 앞에서 다뤘습니다. 방면위원 명단에 자주 등장하는 이명석, 박래승, 김정오, 김봉도, 유재기, 백남채 등 인사는 모두 개신교 목사거나 장로였습니다. 그 중 백남채 같은 인사는 제헌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포함한 더 많은 인사들이 대개 삼일운동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했고 농민운동(기독교 계통의 농민운동은 반일운동은 아니었고,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기는 했으나 경제정책이나 제도적 처방은 없었습니다)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정 총대, 방면위원 같은, 동포를 직접 통제하는 일제의 직임을 맡아 동포 위에 군림하고, 심지어 신사참배운동을 주도한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사실ㆍ균형보도

과거사에 대한 평가조차도 어떤 정치인들이 말하듯이 ‘역사에 맡겨야’ 하겠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매일신문 2014년 1월 1일치 38면에서 다룬 기고 「대구 근대화와 기독교역사문화 콘텐츠의 구축」은 기고자가 무엇을 주장했든(거기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실과 거리(시각에 따라서는 큰 거리감)가 있는 부분이 있으므로 매일신문이 언론 공론장의 마당쇠를 자임하려 한다면 깊이 고려해야 할 바가 있습니다. 바로 균형자 역할입니다. 사실보도, 균형보도가 언론보도의 기초가 아닐까요.

이만집, '자치' 평생 외길

그렇다면 매일신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서상돈 주위를 맴도는 보도가 아닐 것입니다. 참고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 내내 한국기독교를 들었다 놨다 하는 데 대해 대구의 삼일운동을 명실상부하게 주도한 이만집 목사(당시 계성학교 교사)는 교회의 자치 운동을 폈고, 세상 떠나는 날까지 그 길을 견지했습니다.

이만집 목사는 이등박문과 선교사대표가 맺은 ‘정교분리’는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근본에서 옭아매는, 너무나 처참한 독약이란 것을 교육·목회 현장에서 알았고, 알았기에 그는 자치운동으로 ‘정교분리’ 깨기를 실천했습니다.

사실·균형과 거리를 두고 독자 위에 서 있는 언론,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닐까요.






[평화뉴스 미디어창 259]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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