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ㆍ역사 외면하는 '권력층'과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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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와 반민족적 '한일회담'..."역사교육 회피하면 참극"


변하지 않는 국정원  속성

국정원을 둘러싼 비판적 파문이 거칠게 일고 있다. 국정원이 불법으로 선거(대선)에 개입한 것이기에 대통령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국민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이 파문의 한 가운데에 선 국정원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북정상대화록을) 공개했다”고 변명했다(한겨레, 6월 25일 1면).

<한겨레> 2013년 6월 25일자 1면
<한겨레> 2013년 6월 25일자 1면

민주국가의 역사가 거꾸로 요동치는 현장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그러자 민주당의 이해찬 상임고문은 말문을 터뜨렸다. “옛날 중앙정보부를 누가 만들었나. 박정희가 누구이고 누구한테 죽었나…”라고. 중정-국정원의 속성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중앙정보부를 만든 장본인이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손에 운명을 달리할 만큼(10.26 사태) 중정은 대통령도 어쩌지 못한 ‘권력 위의 권력’이었고 그 맥이 ‘국정원’에서라고 변했을 것으로 보는 국민은 많지 않다. ‘권력 위의 권력=무한권력’이란 점에서 보면 오늘의 수구언론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명성황후', 한국사교육 계기를…

마침 경향신문은 우리 근현대사를 어쩌면 원점에서 되짚게 할지도 모를(사료 발굴로 진상을 밝힘으로써 역사의 새 장을 써야할지도 모를) 특종기사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를 다뤘다. 을미사변은 1895年 10월 8일 새벽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이 경북궁에 난입해서 명성황후를 시해해 불태운 국가적 참극(모독)을 가리킨다.

<경향신문> 2013년 7월 1일자 1면
<경향신문> 2013년 7월 1일자 1면
<경향신문> 2013년 7월 1일자 2면(종합)
<경향신문> 2013년 7월 1일자 2면(종합)

경향신문이 특종 보도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의 내용은 이렇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지 않고 피신해 생존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과 영국의 외교문서가 발견됐다는 것. 현재까지는 명성황후가 1895年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당해 불태워졌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인데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이 정설을 뒤엎는 외교문서를 발굴했다.

새 사료 발굴. 진실 찾을 각오

정 교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4개월 뒤에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외교비밀문서와 을미사변 때 탈출했다고 기록한 영국문서를 각각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았다고 지난 6월 30일 밝혔다. 정 교수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도 찾아냈다. 정교수는 “독일·영국 등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던 나라들의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면서 “명성황후의 시해를 당연시할 게 아니라 새로운 사료 발굴로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기자에게 밝혔다.

‘미디어창’은 정상수 교수가 국가적 참극의 전말을 전하는 사료를 발굴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데, 그것은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애써 외면하려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역사의식과 너무도 대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강력한 이유, 바로 수구/보수 세력의 뿌리가 직접적으로 이승만-박정희 정부는 물론이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핵’과 연결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남일보> 1948년 8월 20일자 1면
<영남일보> 1948년 8월 20일자 1면

실제로 우리나라가 건국되고 5일 만인 1948년 8월 20일 영남일보 1면 기사에는 「신정부에 잠입한 친일분자들…」이라는 큰 표제로 이승만 정부가 친일분자들로 오염돼 탄핵이 필요하다는 국회 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정부의 친일분자들을 ‘반민족행위자’로 규정, 규탄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 관련 언론 보도

강대국 휘둘리면 자주성 '미완'

또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가 강대국에 휘둘려 우리의 자주성이 ‘미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정전서명 불참으로 평화협정 당사자 못돼…‘미완의 자주’ 초래」(한겨레, 7월 10일, 6면 정전60돌 기획) 에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의 결실이 마침내 이뤄지면 일본은 물론 미국과 미결 상태인 우리 근현대사의 여러 쟁점들(태프트-카츠라 밀약 등)을 정정당당하게 세계 속에서 풀어나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겨레> 2013년 7월 10일자 6면(사회)
<한겨레> 2013년 7월 10일자 6면(사회)

실제로 태프트-카츠라 밀약을 전후해서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어떤 배신행위를 했는가는 가장 친미적이었던 백낙준 조차 직설을 꺼릴 만큼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의 책 『한국개신교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선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태프트-카츠라 밀약을 “미국의 외교사상에 가장 주목을 끄는 이례의 행정협정”이라고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인식을 보이고 있다. 백낙준은 이 책에서 미국이 한국에서 솔선하여 공사관을 철수한 배경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인민의 분개는 극도에 달하고 재한 미국인들은 무안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솔선하여 그 공사를 소환하여 갔다. 후에 알려진 말이지만 한국인들이 미국의 간섭을 희망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만일 미국이 솔선하여 서울 미국공사관을 폐쇄한다면 참으로 일본인들이 반가워할 것이라고 북경 주재 일본공사가 주중 미국공사에게 암시하면서 그렇게만 조치하여 준다면 한인들의 사기 좌절에 효과적일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제국주의 침략 행각을 저지른 미국이 지금이라고 예외일까?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은 제2의 고종, 제2의 대한제국 친미파가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우리 근현대사 교육을 애써 회피하려는 중심에 박정희의 한일회담-6·3사태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왜? 거기에서 우리는 국가를 강탈당하고, 한 반도의 모든 사람, 토지, 자산, 자원이 일본에게 빼앗기는 등 민족이 수난 당하고 민중이 죽음으로 내몰린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외면한 채 대일청구권자금과 같은(한일회담에서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여러 쟁점들이 졸속으로 처리됐지만 여기서는 우리나라 강탈과 대일청구권자금에 한정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정치군인의 치적으로 삼으려 한, 변하지 않는 ‘친일적 의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완전히, 최종적으로 사라진 청구권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불 일 듯 하는 국민의 반대 투쟁을 진압하면서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에서 우선 ‘미디어창’이 문제 삼으려는 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일제의 식민지배가 1948년 8월 15일 ‘무효’됐다는 해석을 남기게 했다는 것. 한일회담 반대 국민투쟁 당시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독립을 선언한 날까지의 일본의 침략통치가 정당화되고, 일본 총독부 통치를 합법화,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데 대해 항의했으나 국민들의 목소리는 군대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을사조약(1905), 경술국치(1910)와 같은 일제의 국권강탈행위를 합법화, 합리화하는 구실을 박정희 정부가 제공했기 때문에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대일청구권자금은 일본이 향후 10년 동안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자금 2억 달러, 민관차관 3억 달러를 제공한다는 것인데 청구권을 규정한 한일협정 제2조 1항에서 박정희는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협정하는 데 합의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대일 청구권은 이로써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멸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일 청구권은

…지금(地金) 및 지은(地銀)에 대한 청구, 과거 조선총독부 체신국 관계의 청구(우편저금, 간이생명보험 등), 한국에 본사를 둔 법인의 재일재산에 관한 청구, 한국인 소지의 일본계 통화, 각종 유가증권(국채, 공채 등),  피징용자의 미수금 및 보상금, 은급(恩級) 등에 관한 청구, 한국인의 대일정부 및 일본인에 대한 각종 청구 등이 모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소멸케 되는 것이다(대한민국정부, 1965,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조약 및 해설』)

일본에 불씨 쥐어준 '청구권자금'

이것은 지나간 어떤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국민의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다. 이와 관련한 언론보도를 보자. 「법원 “일 징용피해자에 1억씩 배상” 첫 판결」(한겨레, 7월 11일, 10면, 사회)이란 기사의 첫 머리는 이렇다.

1940년대 한국 젊은이들을 일본으로 강제징용해 고된 노역을 시켰던 일본 군수기업에 1인당 1억원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지난해 대법원이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린 뒤 구체적인 손해배상 액수가 결정된 첫 판결이다. 강제징용피해자들이 한국법원에 소송을 낸지 8년,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지 16년 만의 결실이다. 일본기업은 이에 불복해 상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경향신문> 2013년 7월 12일자 10면(사회)
<경향신문> 2013년 7월 12일자 10면(사회)

한겨레는 이 기사에서 왜 강제징용 청구권이 여태 무시돼왔는지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대법원은 “일본법원의 판결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전제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충돌한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도 “일-한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것이 우리나라(일본)의 종래 입장”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대법원과 일본 관방장관의 입장은 상반된 것을 보여준다.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는 언제부터 그랬을까? 대일청구권이 ‘모두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멸케 되는 것이다’라고 박정희가 1965년 정부 문서를 통해 밝혔으니까 대법원이 판결로 밝힌 ‘헌법적 가치’는 박정희 체제와 그 뒤를 이은 전두환 체제를 국민들이 87년 민주화 대투쟁으로 무너뜨리면서 헌법에 도입돼 확립된 것으로 보면 된다. 언론 매체들은 강제징용 배상의 법적 근거를 헌법 전문에서 찾았다고 보도했다(머니투데이 등).

박정희헌법? 국민 헌법?

그러면 그 헌법전문은 어떤 것일까?
‘5.16 혁명의 이념’에서 모든 것을 찾은 박정희(5차, 7차(유신헌법) 개정)의 헌법 전문일까? 아니면 87년 민주화 대투쟁을 전개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우리 민족국가의 역사적, 정치적 근간으로 삼도록 한 평범하지만 역사의식을 보듬어 안았던 우리 국민들의 헌법 전문일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참으로 이상한 것은 대구의 수구신문인 매일신문의 보도태도다. 이 신문 사설을 본다(「강제징용 배상, 반드시 풀어야 할 역사 문제」, 7월 12일, 31면, 오피니언, 사설).

일본 정부와 신일철주금이 우리 법원 판결에 대해 수용 불가 입장을 밝히고 나선 것은 그들이 여전히 과거사에 무관심함을 보여준다. 영국 유력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가 ‘역사적 판결’이라며 의미를 부여한 것과도 어긋난다. 영국 정부는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였던 케냐에서 저질렀던 잘못을 인정하고 본격적인 배상 협상을 벌이고 있다. 독일도 강제 노역자 167만 명에게 6조 원이 넘는 보상금을 지불했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은 반드시 재조명하고 짚어야 할 문제다. 정부도 이를 단순히 강제징용 피해자의 몫이라 치부할 일이 아니다. 이번 판결이 법원의 판단에서 나아가 실질적 배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강제징용의 역사는 남북문제보다 먼저 풀어야 할 과제다.


<매일신문> 2013년 7월 12일자 사설(31면 오피니언)
<매일신문> 2013년 7월 12일자 사설(31면 오피니언)

반민족적 한일조약 책임 애써 외면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은 반드시 재조명하고 짚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강제징용의 역사는 남북문제보다 먼저 풀어야 할 과제’라고도 한다.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런데 이 신문 사설 그 어디에도 대일청구권은 ‘모두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멸케 되는 것이다’라고 협정을 맺은 박정희의 반민족적 한일조약의 문제점은 지적하지 않았다. ‘남북문제보다 먼저 풀어야 할 과제’라면 그 중요도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청구권을 몇 푼에 ‘모두 완전히 최종적으로 소멸’시키는데 합의한 박정희와 그 정부의 책임론은 그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런데도 이 신문은 사설에서 그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내 권력' 지키려 역사 교육 외면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열쇠는 경향신문 기사 「“한국사 필수 어떻게…” 고민에 빠진 교육부」(7월 11일, 16면, 사회), 한겨레 기사 「역사교사 73% “현대사학회 ‘교과서 좌편향’ 주장에 동의안해”」(7월12일 10면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학생들이 한국사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데도 교육부가 온갖 관료적 구실을 들먹이며 미온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친일-반민족 정신과 행위에 뿌리를 두고 온갖 부문에서 권력을 행사해온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 의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2013년 7월 11일자 16면(사회)
<경향신문> 2013년 7월 11일자 16면(사회)
<한겨레> 2013년 7월 12일자 10면(사회)
<한겨레> 2013년 7월 12일자 10면(사회)

선택만 남은 문제

이제 국민들은 선택해야 한다.
특권층이 기득권을 지키고(그러려면 국민들은 역사를 몰라야 하므로) 우민화 정책을 계속하려는 수구 정치인, 수구 언론의 편에 설지, 국민위에 군림하는 ‘권력 위의 권력’의 만행을 거부하고 평범한 다수 국민이 살고픈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 교육을 하는 편에 설지를.

그리고 강제징용 배상과 같은 기사를 어느 신문이 빠뜨리지 않고 실어 알게 모르게(수구신문·종편과 같은 매체들이 ‘애국’을 애써 강조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국민들 나름으로 실사구시의 역사 교육을 하도록 하고 있는지를.

일제가 짓누르고 친일파들이 꾀어 강제징용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할아버지들이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배상 판결이 아직 역사를 잊지 않은 ‘양심’이 이 땅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면 선택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렇다 해도 인내하고 조심할 것은 많다.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한 국정원…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길 지혜와 힘은 역사와 그 역사를 부둥켜안고 살아온 민족(구체적으로는 북한과 미국이 아닌 남과 북의 주민)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평화뉴스 미디어창 240]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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