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말과 땅을 지키는 길

평화뉴스
  • 입력 2013.10.1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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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교과서, 훈민정음ㆍ독도 빠뜨려 / 이승만 "내 국적은 일본"


일제강점기 독소 아직도...


우리 민족생활ㆍ국가 정체성과 관련해 지난 2주 동안 관심을 모은 주제는 교학사 역사 교과서의 훈민정음 빠뜨리기였고, 이승만이 '내 국적은 일본'이라고 자필 서명한 문서를 미국 국립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사실이다. 우리 언론은 이 사실을 어떻게 다뤘나 보기로 한다.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국권을 제국주의 일본에 강탈당한 날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기까지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우리 대한제국의 패망사를 극히 일부분만 담고 있다. 누가 어떻게 지배했으며, 국권을 강탈당한 사람들은 무엇이 되었는지, 국권을 강탈당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기만 했는지, 국권 강탈에 적극 협조한 민족배반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해방된 뒤 우리나라는 어떤 과정을 통해 독립했으며, 일제에 적극 협력한 사람들과 일제에 죽음으로 항거한 사람들, 법과 제도란 미명 아래 일제에 생명을 빼앗기거나 위협당하고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재산과 노동력을 수탈당한 사람들은 해방과 함께 어떻게 됐는지, 일제의 강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상은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받았는지 여부도 일제강점기와 연속되고 청산되고 정리돼야 할 것이므로 그것도 설명돼야 하기 때문이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가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반포라는 역사적 사실을 빠뜨린 것, 해방 전 일제와 투쟁한 리더였고 그래서 해방 후 국부로 추앙된 이승만이 자필로 '내 국적은 일본'이라고 기록한 문서가 미국 국립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데 따른 충격은 우리민족사와 독립국가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고 말았다.

교학사 교과서 역사 왜곡 관련 주요보도

 교학사 교과서 역사왜곡 사태에 대한 최근의 보도는 초기의 국민 분노 단계에서 민주주의 역사 및 민족사 왜곡에 대한 분석 단계로 접어든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위 표는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민주주의와 민족문화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민족문화를 왜곡하다 못해 하잘 것 없으므로 아예 무시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공기가 없으면 단 5분을 버티지 못하듯이, 국민이 공기처럼 호흡하고, 그래서 당연시되고, 그래서 소중한 것이 민주주의와 우리말이다.

  교과서 검정 통과, 의혹 투성이

<경향신문> 2013년 10월 8일자 14면(사회)
<경향신문> 2013년 10월 8일자 14면(사회)

10월 8일의 경향신문 기사 「교학사 '왜곡 교과서', 저자 약력 허위기재」 는 이 교과서 집필진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요건을 일탈하다 못해 교과서 검정 합격 취소 요건에 해당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겨레 9일자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검정기준 미달인데 통과됐다"」 기사는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표절의혹은 물론이고 우리 영토에 관한 사항까지 표기하지 않은 사실을 지적, 당연히 검정기준 미달이어서 불합격 처리돼야 하는데도 검정을 통과한 의혹을 지적하고 있다. 정부는 처음부터 수정ㆍ보완 불가를 고집하고 있다(14일 한겨레).

<한겨레> 2013년 10월 14일자 9면(사회)
<한겨레> 2013년 10월 14일자 9면(사회)

한겨레는 10월 9일 기사에서 도표를 곁들여,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대한민국 정통성, 정체성을 역사교과서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 무시했는지 제시하고, 그런데도 교육부가 검정을 통과하도록 한 것은 특혜임을 독자의 이해에 부응하면서도 강도 높게 다루고 있다.

<한겨레> 2013년 10월 9일자 12면(사회)
<한겨레> 2013년 10월 9일자 12면(사회)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기준 충족 여부(한겨레, 10. 9. 12면)

실수 아닌 의도적 행동


<표>에서 한겨레는 교학사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영토 표기를 누락했다고 지적했는데 이 대목은 교학사 교과서 저자가 어쩌다 실수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도저히 배워서는 안 될 내용을 배우도록 한 사실과 함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무방하다는 목적 만능의 사고에 사로잡혀 집필한 사실을 보여줬다. 10월 4일의 한겨레 8면, 경향신문 12면 기사를 통해 교학사 역사교과서 저자가 발휘(?)한 조폭적 집필 자세를 보기로 하자.

<경향신문> 2013년 10월 4일자 12면(사회)
<경향신문> 2013년 10월 4일자 12면(사회)

한겨레ㆍ경향신문 두 기사가 제시한 교학사 교과서(355쪽)의 대한민국 지도를 보면 동해에 울릉도는 표기돼 있는데 그 옆의 섬에 '독도' 지명은 없다. 이 지도가 교학사 교과서에 실린 과정을 보면 이렇다.

일본 자료 인용, 독도 넘기기?

지철근 박사는 1992년 「평화선 이후의 40년」이란 논문을 썼는데,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억지 주장을 펴오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지방자치단체인 시마네 현 출신으로, 효고 현 히메지 시의 히메지 시립고 교사 후지이 겐지가 「이승만 라인 선포과정에 관한 연구」란 논문을 쓰면서 지철근 박사가 제시한 지도에서 의도적으로 '독도' 명칭을 삭제하고 인용했다. 영토욕에 불타는 시마네 현 출신의 한 극렬 우익 교사는 그렇게 함으로써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삼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 저자는 이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고 '독도본부'라는 시민단체의 누리집에서 인용해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평화선'이란 제목으로 사진을 사용했다. 지철근 박사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논문을 통해 분명히 밝혔으므로 인용하려면 지 박사의 양해를 얻어 직접 인용해야 하는데도 굳이 누리집의 지도를 인용했고, 그것도 독도 명칭을 삭제한 일본인 논문의 지도를 인용한 것이다.

(왼쪽) 독도본부 누리집에 실린 후지이 겐지의 독도지도 / 독도본부 누리집에 실려 있는 우리영토 지도. 울릉도와 독도 명칭이 씌어 있다.
(왼쪽) 독도본부 누리집에 실린 후지이 겐지의 독도지도 / 독도본부 누리집에 실려 있는 우리영토 지도. 울릉도와 독도 명칭이 씌어 있다.

그런데 '독도본부'의 누리집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 명칭이 분명히 기록돼 있고, 「일본의 독도 주장을 살핀다 제27회 이승만라인과 다케시마(독도)」라는 글에서 독도 명칭을 뺀 지도를 곁들이고 「▲이승만라인〔1952년 1월~1965년 6월〕(출전: 후지이 켄지(藤井賢二)「이승만라인 선포과정에 관한 연구(李承晩ライン宣布への過程に関する研究)」『조선학보(朝鮮学報)』185호 2002년 10월)」라고 지도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굳이 독도 명칭이 빠진 지도를 곁들인 것은 '일본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는 것을 독도본부는 말하려고 한 것이다.

지도에서 독도 명칭을 뺀 것은 일본인인데도 교학사 교과서 저자는 지도를 처음 작성한 지철근 박사의 논문을 인용하거나 확인하지 않고 사용했다. 교학사 교과서 저자는 이승만의 평화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겠다면서도 독도가 한국령임을 고의로 빼버린 후지이 겐지의 지도를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독도는 일본 땅'을 만들어주고 말았다. 교학사 저자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려한 것은 교과서를 통한 '독도 포기'인가? 

지철근 박사 논문의 지도(왼쪽)와 미국 클라크가 그은 '클라크라인' / 지철근 박사의 지도에는 울릉도, 독도 지명이 있는데 후지이 겐지는 독도 지명을 빼고 인용했다.
지철근 박사 논문의 지도(왼쪽)와 미국 클라크가 그은 '클라크라인' / 지철근 박사의 지도에는 울릉도, 독도 지명이 있는데 후지이 겐지는 독도 지명을 빼고 인용했다.

훈민정음 역사도 빼먹어


경향신문은 지난 9일 「교학사 교과서 '훈민정음'도 빠뜨렸다. 민주당 김태년 의원실, 검정 한국사 8종 비교」 기사를 10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내용을 인용하면 이렇다.

<경향신문> 2013년 10월 9일자 10면(사회)
<경향신문> 2013년 10월 9일자 10면(사회)

김태년 민주당 의원은 8일 "최근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8 종을 분석한 결과, 교학사 교과서는 훈민정음에 대해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단원 시작 페이지 소개말에 '초기에는 한글을 창제'했다고 짧게 기술하고, 뒤쪽 연표에 '훈민정음 반포 1446'이라고만 표시돼 있었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단원 소개 글 외에 본문에는 훈민정음이란 말이 전혀 언급돼 있지 않아 훈민정음을 누가 창제했고,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훈민정음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나 설명은 교과서 본문에는 없는 것이다. 반면 교학사를 제외한 7종의 교과서에는 훈민정음에 대한 자료사진이 게재되어 있고(해례본 또는 언해본), 대부분은 소단원을 통해 훈민정음 창제과정과 의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은 창제과정에서는 훈민정음으로, 현재는 한글로 우리민족 말로 사용되고 있다. 제 민족 말이 없는 민족이나 말을 빼앗긴 민족(일제 때 우리 민족, 현재 터키의 쿠르드 민족 등)은 말을 빼앗김으로써 민족정신을 말살당하고 그 결과 그 민족은 '동화'과정을 거쳐 지배민족에 예속된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노린 것은 우리말 사용을 억압하고 그것이 효과를 거두자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목적은 우리 민족을 일본민족으로 동화시켜 영구 지배하려는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민족은 우리 민족 말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민족성을 지킬 수 있었고, 비록 통치권은 일제에 강탈당했지만 민족사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지켜낼 수 있었다. 말을 빼앗겼다면 민족사를 지켜내기는 정말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는 청소년들의 역사교과서에서 훈민정음의 역사를 인용한 글처럼 빼버렸다. 한글의 역사를 지운 다음에 올 것은 뭘까? 우리 민족정신을 희미하게 하려고 하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제 민족 말의 역사를 뺄 수 있을까.

필자가 입수한 교학사 교과서에 실린 훈민정음 관련 글은 이렇다. 'Ⅲ 조선 유교 사회의 성립과 변화' 단원 시작 페이지 소개말에 '초기에는 한글을 창제하고' '훈민정음 창제 1443', 부록(연표)에 '훈민정음 반포 1446'이 전부다. 세계에 자랑할 표음문자가 한글이고 엊그제 한글날 기념식과 행사를 성대히 치렀는데 정작 교학사 교과서는 그게 못마땅했을까.

총독부 검정 일본역사보다 못해


참고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한글에 대해 어떻게 다뤘는지 살펴보기 위해 1920년 5월 17일 발행된 『조선총독부 검정, 대일본역사제요 全』을 살펴봤다(동경 합자회사 부산방(富山房) 발태(發兌·책 따위를 인쇄ㆍ출판하여 널리 팖), 가등성일(加藤盛一), 고교준승(高橋俊乘) 합저(合著)).

「제33장 조선의 초세(初世), 조선의 역(임진왜란을 가리킴)」에서 태조 이성계, 정종,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연산군, 명종, 선조를 다뤘는데 세종의 훈민정음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다음 왕 세종(제4왕)도 역시 학문을 좋아하고, 형옥을 관대하게 하고, 조세를 정비하고, 또 언문을 만들게 하여 세상에 편하게 하였으니 해동의 요순이라고 칭하였다.(111쪽)


조선총독부가 1920년 발행한 역사교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등이 소개돼 있다.
조선총독부가 1920년 발행한 역사교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등이 소개돼 있다.

'그게 그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1920년은 3·1독립만세운동을 우리민족이 거족적, 전국적으로 일으킨 직후이고 그에 따라 일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극력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우리 역사와 우리 말 교육 시간을 대폭 줄이거나 못 가르치게 하고 자제단이다, 교풍회다 해서 우리 민족의 항일 동태를 우리 민족(각 지역 유지·지주급 인사들)을 시켜서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던 때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우리 민족 말의 역사를 '일본역사'에 넣어 교육한다는 것은 일본인으로서도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한글을 만들어 보급한 주체가 세종임을 밝혔는데(동화의 한 방편이었겠고, 나머지 대부분 항목은 일본사의 부수 항목으로 다뤘다), 이 점에서만 보면 훈민정음을 누가, 왜 창제했고 창제 반포한 의의는 무엇이었는지 주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본문에서 아예 빼버린 교학사 교과서보다 못하지는 않을 듯싶다.

이승만 "나는 일본인"


교학사 교과서가 훈민정음의 역사를 빼먹은 사실이 공개된 다음날(10월 5일) 뉴시스 통신은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美 체류시절 자필 국적 표기 충격』 기사를 보도했다. 경향신문도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前 대통령 미국 문서 논란』 기사를 인터넷 판으로 띄웠다(10. 6.) 경향신문 디지털 뉴스 팀이 보도한 기사를 인용하면 내용은 이렇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는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이 카드에는 나이(44세)·음력생일(3월26일)·직업(한국학교 교장)·하와이 거주 주소 등 인적사항들이 나와 있다. 또 '가장 가까운 친척'은 이 심(Shim Rhee)으로 관계를 '누이'로 한국 주소와 함께 작성했고, 인종은 '동양인(Oriental)'이라고 표기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기재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시점이기는 하지만 하와이 등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친 그가 신상 정보난에 국적을 일본으로 밝힌 것은 의문이다. 1차 대전 징집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징집 카드는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18~45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시민권자는 물론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남성들을 포함, 미 전역에서 약 2400만명이 카드에 자신의 개인정보를 수록했다. 그가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시점에서 아시아의 열강인 일본의 국민으로 신상정보를 기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등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가 미국의 공문서에 '일본인'이라고 밝힌 것은 아이러니하다.
일각에서는 논란거리인 그의 '친일성향'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러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8월4일, 그는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이승만이 고종 밀사로 파견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됐지만 당시 뉴욕헤럴드 트리뷴 등 미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과 윤병구는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부정했다. 1904년 결성된 일진회는 이듬해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을 적극 찬성하는 등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친일단체로 성장했다.


"일본에 할 말 없게 됐다"


"내 국적은 일본" 기사를 맨 먼저 보도한 뉴시스는 국적 란에 "일본(Japan)"이라고 적힌 이승만의 자필 사진으로 즉각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뉴시스 기사를 인터넷으로 접한 독자들은 "이럴 수 있나! 일본에 할 말 없게 됐다!"고 탄식했다. 60대 후반을 넘긴 지식인 노인들이 많이 장탄식을 토했다. 뉴시스 기사 전문은 이렇다.

<뉴시스> 2013년 10월 5일 기사
<뉴시스> 2013년 10월 5일 기사

[뉴욕=뉴시스] 노창현 특파원=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고 있는 가운데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사 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 국적일 일본으로 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관련 뉴욕한국일보는 이 서류는 '제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U.S. WorldⅠDraft Registration Cards)'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이름(Syngman Rhee)', '생년(1875)' 등과 일치하는 연방문서 60건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이 카드엔 나이(44)와 음력 생일(3월 26일)과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하와이 거주 주소 등 인적사항들이 나와 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친척'은 이 심(SHIM Rhee)으로 관계를 '누이(Sister)'로 한국 주소와 함께 작성했고 인종은 '아시안(Oriental)'이라고 표기했다. 


교학사 교과서 사태는 뉴라이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지만 한겨레가 「교학사 교과서,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보다 우편향」(한겨레, 10. 14. 9면) 제목으로 보도한 것처럼 극렬하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다든지, 사실(fact)보다 이념에 바탕을 둔 주장을 비논리적으로 밀어붙이는 점에서 보면 히틀러의 폭력에 바탕을 둔 선전술이나 일본의 전범 도조 히데키와 같은 상층 군벌귀족의 맹목적 행동성을 강하게 닮았다. 같은 교학사 교과서를 다루더라도 조중동은 사실(史實)에 바탕을 둔 합리성이나 학문으로서의 역사에 바탕을 두고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간, 민족공동체, 민족문화, 평화 만들기보다는 이승만 변호, 박정희 영웅 만들기, ‘함께’ 보다는 ‘나를 따르라’를 선전하는 데 과도하게 주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교학사 교과서 사태는 이승만·박정희 영웅 만들기와 궤도를 같이 하고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려 하고 있다. 조중동 언론의 보도 빈도와 내용은 그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권력에 기댄 '조폭적 행동성'은 더 많은 분야에서 발호할 것으로 전망된다. KBS·MBC, 종편이 권언유착을 뿌리 깊게 형성해나가는 데서 보듯이 언론이라는 확성장치는 그 속성으로 인해 국민을 가르고 포기하게 하는 방향으로 기능할 것이고 그런 가운데 ‘언론불신’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인간ㆍ민족 없는 권력의 작품
 

대한민국의 정체성, 합리성을 지향하는 삶의 길, 일제강점기조차 이겨낸 민족성(민족 말, 민족사)은 폭력적 현실권력과 무관심, 언론의 조폭적 언동에 여태 잘도 대응해 왔다. 하지만 소수의 발굴, 분석 발표에 의존하는 '낙과 줍기' 대응은 너무 낙관적이어서 불투명하다. 해방공간에서는 걱정과 격정 속에서 기대와 기회를 미군정의 보호막에 의지해 친일파 기득권세력이 거두어 갔다. 그 역사 왜곡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범람하는 외세 속에서 우리를 찾는 일은 어디로 보나 시급하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와 정부의 대응. 거기에 드러난 공통점은 이렇다. 작심하고 달려드는 조폭성, 개인·국민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면서도 달려드는 날벌레 같은 망국성,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반공동체성, 일제강점기에 최후의 보루가 된 민족사·민족문화를 잘라내는 반민족성. 거기에 조중동 같은 인쇄매체, 국민이 주인인 전파를 이용하는 KBS·MBC가 길잡이 노릇하고 있고 있다. 왜? 거기에 권력(광기 서린)이 있기에. 교학사 교과서 왜곡 사태는 그래서 총체적으로 반인간적, 반역사적이다.

모르면 당한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60대 주부 보험설계사의 말을 인용하려고 한다.
"역사, 너무 몰라예. 저래도 되는 깁니꺼. 인자는 역사 좀 알아야 되겠습디더. 그래야 안 당하지예"






[평화뉴스 미디어창 251]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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