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평리에서 생각하는 '오월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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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우리의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


시민군

1980년 5월 27일 광주, 마지막 방어선인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던 피의 새벽,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던 시민군 전사들의 정신을, 지금 나는 초고압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싸우고 있는 청도 각북면 삼평리 농성장에서 묵상한다. 우리의 ‘오월’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밀양 주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 덕분에 우리 사회는 송전선로의 문제, 즉 반민주적이고 불공정한 전력 공급 시스템의 문제에 비로소 눈뜨기 시작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1979년) 제정된 전원개발촉진법. 이 법에 따라 전원사업(발전소, 송전탑 등)으로 지정되면 사업자는 19개 법률에 규정된 규제를 피할 수 있으며, 심지어 토지를 강제수용할 수 있다. 주민들은 평생 살던 집과 논밭, 선산마저 한전의 소유가 되어도 이를 거부할 방법이 없다.

‘경제성장’, ‘산업입국’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자본과 기업의 돈벌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리고 그에 필수불가결한 ‘값싼’ 전기 생산과 공급로를 일사천리로 확보하기 위해, 헌법과 여러 법률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간단히 ‘절약’하고 ‘제거’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악법이라는 것은 길게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전원개발촉진법은 성장독재의 강력한 제도적 장치 중 하나에 다름 아니다. 

성장독재의 절대 교의(敎義)는 “생명보다 이윤을”이다. 이러한 교의는 전원개발촉진법에 의해서도 일관되게, 성공적으로 실현되어 왔다. 발전소와 송전탑이 들어서는 해안과 논밭, 산과 마을은 마치 점령군과도 같은 공권력과 건설업체들의 군홧발과 중장비 아래 유린되었다. 주민들의 재산권과 건강권이 침해당하고, 무엇보다 수백년 평화롭게 살아왔던 마을 공동체가 더러운 돈다발을 앞세운 회유와 이간질에 분열되었다. 하루아침에 이웃끼리 원수가 되어버린 무수한 마을들이 갈갈이 찢긴 채 ‘침몰’당해야 했다. 이토록 참담한 재난이 지난 30여년 동안, 방방곡곡에서 이어져 왔다.

여기에 저항하는 것은 곧 ‘국가시책’에 대한 불복종으로 간주되어 철저히 탄압받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주민들은 온갖 폭력과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젊은 용역과 한전 직원들에게 “개 끌 듯이” 끌려다니고, 땅바닥에 패대기쳐지고, 조롱당하고, 모욕당해야 했다. 경찰의 감금과 고착, 체포와 미행이 일상이 되었고, 온갖 고소고발에 시달리며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다녀야 했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주민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가며 항거해야 했다.

따라서 지금 밀양과 청도 삼평리 주민들의 싸움은, 한전과 어용언론들이 끊임없이 매도하는 것과 같은 ‘보상’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나만 살겠다”는 지역이기주의의 발로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돈으로 해결할 거였으면 이미 손 털었다,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는 삼평리 할매들의 외침에는 조금의 가식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 싸움은 무엇인가? 주민들의 싸움은 “그렇다면 국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엄중히 묻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 가만히 있으라”고 끊임없이 주민들의 손발을 묶고 재갈을 물려왔던 국가권력을 향해서.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평화공원'(2014.3.11) /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평화공원'(2014.3.11) /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그것은 저 80년 광주,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와 계엄군의 총칼 앞에서 시민들이 던졌던 질문과 같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낡은 소총을 들고 스스로 군대(시민군)를 조직했다. 그러나 당시 시민들이 들었던 총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무엇인가를 파괴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너무나도 약한 것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질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던지는 존엄한 질문, “국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미 삼평리의 싸움은 송전탑 한 기를 막고 못 막고, 이기고 지고를 넘어선 싸움이 되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할매들의 다짐은 그래서 허언(虛言)이 아니다. 삼평리 평화공원의 장승과 망루, 허름한 농성장, 거친 바람에 하루하루 낡아가는 붉은 깃발은, ‘오월 광주’의 새벽을 지키던 시민군이 움켜쥔 소총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생과 사를 넘어선, 존엄한 질문이다.

주먹밥

‘오월 광주’는 학살의 이미지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꽃잎처럼 스러져간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 피해자의 기억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으로 ‘추모’되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민주 시민들의 ‘항쟁’의 역사이다. 나아가 그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연대’와 ‘자치’의 경험이기도 했다. 계엄군을 몰아낸 도시에는 광주 시민들에 의해 평화로운 자치 공동체가 수립되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에 나섰고, 거리를 청소했고, 서로가 서로를 보호했다. ‘주먹밥’의 공동체, 도시는 하나의 밥상 공동체로 거듭났다. 국가가 물러난 도시에서, 약탈과 폭력은 비로소 사라졌다. 공권력이 사라진 곳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비로소 조화를 이룬 해방구가 탄생했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1리 당산나무...이 곳에서는 3월 1일 '삼평리 평화를 위한 대동 장승굿'이 열렸다. / 사진 제공. 이용우(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1리 당산나무...이 곳에서는 3월 1일 '삼평리 평화를 위한 대동 장승굿'이 열렸다. / 사진 제공. 이용우(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삼평리에도 지금 새로운 공동체의 싹이 자라고 있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삼평리의 친구들’은 그동안 고된 저항을 이어오며, 밥상 공동체를 이루어 왔다. 대구의 시민단체들과 생협, 노동조합들이 번갈아가며 농성장을 지키기 위해 마을에 와서, 할매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밥을 나눠 먹으며, 마을의 역사를 듣고, 주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때로는 막걸리 잔을 주고받기도 한다. 농성장에서 함께 먹는 밥은 한끼 한끼가 ‘성찬의 전례’다.

또 5월 중순 이후 농번기를 맞으면서, 대구의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바쁜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농활을 오고 있다. 특히 복숭아와 사과 같은 과수의 적과(열매솎기)처럼 품이 많이 드는 일에 이런 일손 지원은 참으로 고마운 연대활동이다. 작년 가을에는 이곳 삼평리의 특산품인 감 말랭이를 대구의 단체와 노조들을 중심으로 판매하여, 투쟁기금을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6월 10일 전후, 양파 수확을 위한 일손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함께 땀 흘리는 노동이야말로 공동체의 기초가 아닌가.

송전탑 반대 싸움으로 마을과 인연을 맺은 몇몇 활동가들은, 앞으로 삼평리로 귀촌해 ‘주민’이 되어 함께 살아갈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이들에게 삼평리의 싸움은 이미 ‘송전탑 공사 저지’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다. 이것은 침몰하는 국가 앞에서 생존을 위해 던지는 엄중한 질문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

갑오년, 오월

역사로서의 ‘오월 광주’는, 그러나 결국 고립되고 말았다. “국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라는 시민군의 낡은 소총이 던진 질문은 고립되었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자치 공동체의 질문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그것이 아무리 존엄하고 절박한 질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외면과 방치, 굴종 앞에서 그것은 열매를 맺을 수도, 꽃을 피울 수도 없다. 그 질문의 싹이, 여린 뿌리가, 메마른 땅에서 말라죽지 않도록 하려면, 그리하여 그것이 덩굴 줄기를 뻗어나가 담장의 경계를 넘어서도록 하려면, 마침내 초록의 거대한 폭발로 부활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고립되지 않도록 연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얼마나 참혹한 비극이 벌어지는지, 역사는 얼마나 참담하게 후퇴하는지를, 5월 27일을 맞으며, 1980년 ‘오월 광주’를 기리며, 우리는 다시 한번 뼈아프게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삼평리와 밀양의 주민들과 연대하는 것은 ‘오월 광주’ 시민군들의 투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의 ‘명령’에 불복종하려는 시민들의 저항이 연일 진화하고 있다. 지방선거 기간임에도, 시민들의 슬픔과 분노에서 촉발된 직접행동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투쟁으로 확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투쟁을 선거로 ‘수렴’하려는 제도 정치권의 요구조차 많은 시민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는 이데올로기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선거에서의 ‘선택’으로만 제한된 민주주의, 폴리스라인 안에서만 ‘허용’된 자유를 넘어서려는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오월 광주’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자, 계승해야 할 깃발이다.   

갑오년 5월, 우리는 또 이 땅에 어떤 역사를 쓸 것인가.






[변홍철 칼럼 30]
변홍철 / '청도 345kV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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