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왜 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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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 | 송태욱 옮김 | 자음과 모음 펴냄 | 2012)

 
책 속에 길은 없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 물론 하나의 농담이지만, 이 말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도 있다. 일반적으로 책에 길이 있다는 말의 의미는 책을 통해 어려운 문제를 풀고, 삶의 지혜를 얻고, 나와 인류가 걸어갈 방향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길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이 마치 지도가 될 수 있다는 듯이. 이 코너의 제목인 ‘책 속의 길’도 그런 의미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는가? 정말로? 책이 길이 있다면 왜 나는 이토록 오랫동안 헤매고 있는가? 나는 신앙에 답이 있다고 믿고 신학을 공부하려고 마음 먹었지만, 신학 책을 읽고 신앙의 길을 잃었다. 책을 너무 적게 읽었던 것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조언 뒤에는 ‘단,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거나 ‘책에는 길이 있지만 아주 부분적으로만 있다’는 말이 덧붙여져야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오르한 파묵은『소설과 소설가』(민음사)에서 “책 속에는 수많은 우회로가 있다”고 썼다. 책 속에는 내가 찾는 길이 없다는 은폐된 진실을 소설가다운 완곡한 표현으로 쓴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책 속에 수많은 우회로가 있다면 우리는 길을 꼭 책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우회로라면 책 밖에도 많다. 이제 나는 길을 찾아보겠다는 뜻으로 더이상 책을 읽지는 않는다. 책을 읽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책 속에서 길 찾기를 그만두었다고 해서 책 읽기를 중단한 적은 없다. 책 속에 길이 없다고 믿는다면, 책을 통해 헤매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왜 나는 책을 읽는가?

 사사키 아타루가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온갖 종류의 위기와 예고되는 종언 속에 흔들리는 문학을 변호하려는 책이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책에 관한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책이 더 이상 길이 되거나 길을 알려줄 수 없게 되었다는 믿음이 팽배한 세계에서 책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에 답하려는 책이 아니다. 전통적인 철학의 제1과제가 ‘책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존재론적 물음이었다면, 사사키에게는 ‘우리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와 같은 윤리학적 물음 혹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와 같은 방법론적 물음이 근본적 물음이 된다. 책을 읽는 방법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구성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책이 우리에게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을 단서를 주기 때문이다.
 
 
 
책을 어떻게 읽는가
 
 사사키에게 책읽기란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혹은 열차 안에서 좋아하는 책을 즐기며 읽는 것이 아니다. 또 학생과 연구자들이 책상 앞에 앉아 논문을 읽는 식의 책읽기와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사키에 따르면 이것은 책을 읽는 행위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책읽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책을 읽는 행위일 수는 있어도 ‘책읽기’라 말할 수 없다는 말은 역설처럼 들리지만 사사키에게 ‘책읽기’라는 하나의 고유명사다. ‘책읽기’는 ‘정보를 얻는 행위’로서의 읽기와는 구분되는 읽기 방식이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다양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영화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듣는 것을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만, 음악활동도 그만두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잡지 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스포츠 관람도 그만두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담배도 끊었습니다. (중략) 그리고 다양한 정보를 차단하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밖에 듣지 않고, 친구가 권하는 것밖에 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따금 있는 일입니다. (중략)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18쪽)

 사사키는 마치 세상과 자신을 절연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텔레비전과 인터넷은 물론 잡지도 보지 않고, 영화관과 미술관도 가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은 “무식해지기로” 했다고까지 한다. 마치 세상과 자신을 절연하려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사키가 버리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다. 그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정보를 모으는 행위를 그만둔 것이다. 그러니까 사사키에 ‘책읽기’란 정보를 모으는 일이 아니다. 정보에 대한 사사키의 생각은 들뢰즈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 들뢰즈는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하이데거도 ‘정보’란 ‘명령’이라고 했다. 두 철학자에게 정보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정보는 언제나 우리에게 명령한다. 우리는 정보를 모으고, 각자가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사사키는 정보를 긁어모으는 일은 명령을 모으는 일이다. 그래서 사사키는 정보를 모으는 일체의 일을 그만둠으로써 ‘정보의 명령’에서 탈주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신문도,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인터넷 신문도, 하나의 정보라면 타락한 것이다.

 공부에서 언제부터인가 배움보다 입시정보가 중요해졌다. 결혼할 때 사랑보다 결혼정보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부동산 정보를 통해 결정된다. 책을 소개하는 글을 통해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읽는 행위를 대신하려는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애호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강의를 듣는 것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타락이 인간과 세계를 분절시켜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정보는 인간을 단편화시킨다는 점에서 타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보를 모으지 않는 책읽기란 무엇일까? 사사키 아타루에게 ‘책읽기’는 굳이 표현하자면 ‘책을 읽어버리는 것’이다. 그냥 책을 읽고 정보를 모으고 ‘아 정말 쓸모 있는 책이군..’과 같은 감각이 아니다. ‘오 맙소사, 내가 이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다...’와 같은 감각에 더 가깝다. 이 책에는 이런 감각의 ‘책읽기’를 보여주는 몇몇의 사례가 소개된다.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言)의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중략)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문학자 스스로가 왜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114쪽)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마틴 루터는 최대의 혁명가다. 그리고 루터가 촉발시킨 대혁명은 ‘성서를 읽는 운동’에서 출발했다. 루터는 철저하게 성서를 읽었다. 라틴어로 된 성서를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할만큼 철저하게 읽었다. 종교개혁의 구호는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라는 것 역시 성서를 강조하는 것만큼 성서 읽기를 강조한 것이다. 성서를 읽어버리는 바람에 평범한 농민의 아들인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었다. 루터는 신약성서의 계시록에서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나타나 했던 명령, “이 책을 먹으라”는 그 명령에 따라 책을 읽었다. 이것은 마호메트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을 수 없던 문맹이었던 그에게 천사는 ‘읽어라’는 명령을 한다. 그리고 그 명령에서 이슬람 세계가 시작되었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어디에 치는가?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에 줄을 치며 읽고, 자신이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을수록 더 즐거운 독서경험이었다고 보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맹이었던 마호메트에게도 그랬을까? 교황의 권위 앞에서 목숨을 걸었던 루터에게도 그랬을까? 사사키 아타루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제1질문,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은 책이 정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책을 왜 읽는가

 이 책에는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우리는 책을 왜 읽는가? 사사키 아타루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 ‘단절’의 경험이다. 종교개혁, 이슬람혁명, 프랑스혁명은 언제나 새로운 질서(logos)라는 의미에서 ‘책’(liber) 혹은 ‘법’(lex)을 남겼고, 이 책은 혁명 이전 세계와 연속이 아닌 ‘단절’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발터 벤야민과 데리다가 말해주듯이 혁명이 폭력으로 촉발된다는 ‘폭력혁명’이라는 생각은 200년도 채 되지 않은 것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혁명의 시작은 책에서, 문학에서,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몇 마디를 덧붙이면, 지금의 문학은 문학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가져온 몸집에 비교해볼 때 가장 왜소한 체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크, 뉴턴, 흄, 버클리 등 과학과 철학도 모두 한 때는 문학으로 불렸다. 즉 문학은 세계를 읽고, 세계를 다시 쓰는 일체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은 인문 영역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을 읽고 세상을 다시 쓰는 행위가 문학 행위라면, 문학 행위는 곧 혁명 행위가 되는 것이다.

“대혁명이란 책을 읽는 겁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반복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반복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같은 책을 단지 되풀이해서 읽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세계을 반복적으로 읽었고, 다시 반복해서 세계를 되풀이해서 썼다는 것이다. ‘책읽기’는 책을 읽는 행위와는 달리 세상과 우리를 단절시키고, 단절되었다는 점에서 자신이 미치거나 세상을 미치도록 만든다.

잘라라 그 기도하는 손을
하늘에서 허공에서
눈의 가위로
손가락을 잘라라
너의 입맞춤으로
이렇게 접혀진 것이 숨을 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책의 제목은 파울 첼란의 책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제 이 시에서 눈의 가위, 입술, 입맞춤은 모두 ‘책읽기’를 은유하는 표현으로 읽힌다. 숨을 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난 접혀진 것은 ‘책’의 은유로 읽힌다. 혁명을 위해서라면 폭력은 물론이거니와, 기도도 필요하지 않다. 대신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닌 ‘책읽기’, 다시 말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단편성에 저항하고 인간과 세계를 다시 읽고, 다시 쓰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suhrkamp 펴냄. 1970
suhrkamp 펴냄. 1970

책 속에, 길이 있다

 책 속에 길이 없다면, 책을 물론이거니와 성서와 불경조차도 단편적으로 읽어버리는 타락한 읽기 방식 때문일 것이다. 적폐 청산의 과제가 놓여있는 우리에게도 이 과제를 타락시키지 않는 방식은 습속과 제도, 사회를 하나의 법으로 재갱신하고, 마호메트와 루터가 그렇게 했던 것 같이 새로운 ‘책’을 남기는 것이다. 혁명은 범죄를 저지른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다고 완수되지 않는다.
 
 책 속에 길이 있다면, 전혀 다른 의미의 ‘길’이 있다. 책 속의 길은 생각과 사회를 갱신시키는 길이라는 점에서 예상과는 아주 다른 길이다. 그렇다면 책 속에 수많은 우회로가 있다는 오르한 파묵의 말은 진실을 은폐한 것이 아닌 책 속에서 만나는 길은 언제나 낯선 길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 책을 오직 ‘책읽기’라는 행위에 집중해서 소개했지만, 사사키가 이 책에서 겨냥하는 견해는 문학이 근대 사회에서 수행해온 역할이 이제 끝났다는 ‘문학의 종언’ 테제이다. 뉴턴과 아인슈타인과 로크와 칸트가 문학자이고, 세계를 다시 읽고 쓰는 것이 문학이라면 거짓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책에는 더 이상 길이 없다는 지난 수년간 안개처럼 퍼져나간 ‘문학의 종언’ 선언이야말로 거짓일 것이다.
 
 인문학은 이름 그대로 인간의 단편화에 대한 저항이자 전체성에 대한 지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글 역시 이 책의 아주 일부만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단편적인 글, 반-인문학적인 글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책을 읽으라고 소개하는 모든 책 소개하는 글들이 담고 있는 원죄일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글을 쓰는 자에게, 강연을 하는 자에게 있는 것일리 없다. 하지만 죄를 용서받기 위해 손을 모아 기도할 필요는 없다. 강연 인문학이 독서 인문학을 대신해버리는 시대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책 소개 글이든, 강연 인문학이든 책을 매개하는 온갖 것들을 통해 누군가 바로 그 책을 읽어줄 때 책을 소개한 타락한 글은 비로소 죄를 씻는다. 이 글의 구원도,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책읽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책 속의 길] 151
권영민 / 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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