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그 후 50년... 김용균, 아직도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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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민 /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 돌베개 펴냄 | 2001)

 
 대구시내의 한 중고서점을 둘러보던 중 괜찮은 상태의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게 ‘전태일 평전’ 이었다. 특별히 추천을 받았거나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고르게 된 책은 아니었다. 글자가 엄청나게 작고 많았고 사진도 별로 없었으며 죄다 흑백으로 된 전태일과 가족 그리고 동료들 사진 따위가 전부였다. 단지 괜찮은 상태에 저렴한 가격 그리고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어서 사게 된 책이다.
 
 책을 사놓고도 바로 읽지도 않았고 한참 동안 책꽂이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책 제목과 표지가 선 듯 시도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감이 있었다. 하지만 한번 읽기 시작한 후에는 엄청나게 빨려 들어서 읽게 되었다. 적어도 나한테는 유명작가의 소설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동안 이름만 알고 있었던 전태일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고 감동적이었다.

인간을 물질화 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전태일평전 2차 개정판 p.186>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의 사후에 발견된 5권의 노트를 인권 변호사 조영래씨가 정리,집필한 책이다. 1983년 초판이 발행되었지만 저자를 밝힐 수 없었으며 제목 또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수 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판매금지를 당하는 등 숱한 역경을 견뎌낸 후 1990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제목과 저자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책의 기구한 팔자가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에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짧은 생을 살다간 청년이다. 아버지 전상수의 사업실패로 인해 전태일은 어린 시절부터 안 해 본 일이 없었고 이러한 경험은 전태일의 머릿속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의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했던 일들이 결국 전태일로 하여금 스스로 분신하게 만들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 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貧富)의 법칙입니까?
 <전태일평전 2차 개정판 p.92>


 평생을 가난과 싸우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전태일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 몸에 불을 질렀을까? 죽는 순간까지 가난한 노동자였던 전태일은 봉제사였던 아버지의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워 동료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되었고, 넉넉하진 못해도 충분히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다’라고 불리는 어린 여공들이 14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는 현실을 몹시 괴로워했고 더 나아가 평화시장에 근무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고질적인 직업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되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한다. <바보회> 라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사측과 협상하고 여의치 않자 노동청까지 찾아가 평화시장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냉소와 무시만 돌아올 뿐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최후의 선택으로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화형식을 거행하며 근로기준법책과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들이 붇는다.
 
내 죽음 헛되이 말라.
 

 전태일은 자기 몸을 촛불삼아 평화시장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려 했고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에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다. 나는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운동권 대학생도 아니지만 내용은 몰라도 최소한 ‘근로기준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 또한 전태일의 영향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전태일은 그가 죽은 지 50년이 다 돼가는 지금 대한민국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안타까운 희생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 분신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하루 평균 3~5명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있으며,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에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 산업재해로 인정받아 보상을 받기가 참 어려운 현실이다.

 작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도 비정규직 노동자셨고 근로현장에서 돌아가셨다. 산재보상금을 알아보며 몇몇 노무사들과 만나봤지만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업장은 서류상으론 5인 이하의 사업장이었고 아버지를 포함한 대다수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근로계약서는 고사하고 급여일에는 전액을 현찰로 지급 받았다고 한다. 일도 했고 급여도 받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의 동료들 중 대부분은 작업장에서 해고되는 것이 두려워 증언을 꺼렸지만 그분들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그 곳에서 아버지가 받았던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정도의 대우가 제일 나은 형편이었다면 그보다 못한 분들은 얼마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일을 한단 말인가..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친구분께 전해들은 바로는 그곳 노동자들의 상황은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의 형편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형편이었다. 아니 전태일 사후로 50여년이 흘렀으니 오히려 그때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결국 산재보상금 신청도 포기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사업장은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처우가 겉보기엔 진일보 한 것 같지만 여전히 전태일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얼마 전 5월1일은 제129주년 노동절 이었다.대구에서도 노동자 대회가 열렸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 노동절 노동자대회에 참여했다. 약 4000여명에 이르는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한곳으로 모였고, 여러 가지 구호를 외쳤지만 그중에서 탄력 근로제 확대와 노조법개악 그리고 최저임금 개악 반대 등의 구호와 비정규직 철폐, 이주·여성·장애인·5인 미만 사업장노동권 보장 등의 구호 등이 주된 구호였다. 대회참가자들은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지난 몇 해 동안 노동절행사에 참여했다는 한 지인은 지난 몇 년간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체 언제까지 같은 구호를 외쳐야 하냐면서 푸념했다. 사측과 정부의 방관인지 노동자들의 구호가 무리한 것인지는 선뜻 판단하기 힘들지만 지난 수년간 노사정의 대화체가 공회전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1970년의 전태일은 자신이 죽음으로서 오늘날의 김용균과 같은 안타까운 비극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태일 사후 50여년...아직도 이 땅의 노동자들은 전태일이 죽어가며 외치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고 있다. 안전메뉴얼이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 현실, 한줌도 안 되는 알량한 인건비가 사람 목숨보다 더 귀한 세상, 그런 현실과 세상에서 젊은 노동자 김용균이 작업 중 사망했다, 이제 더 이상 안타까운 죽음을 방관하지말자. 전태일 정신을 다시 상기하자. 20년남짓 짧은 생에 전부를 가족들의 생계와 동료들에 대한 걱정과 헌신으로 살아간 전태일이 그립고 가엾다. 한시 바삐 전태일의 몸에 붙어서 아직도 타고 있는 그 불을 꺼주고 싶다. 그리고는 평생 동안 밥 한끼 배부르게 먹어본 적 없는 그에게 따뜻한 밥 한상을 대접하고 싶다.
 
 
 
 
 
 
 
 
[책 속의 길] 167
하수민 / 팟캐스트 '지잡대' 운영자
(지잡대 : 지방대학생들의 잡학다식한 대국민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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