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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사람들이 지지 않고 싸우는 법
신동희 / 『보건교사 안은영』(정세랑 지음 | 민음사 펴냄 | 2020)
2021년 09월 15일 (수) 11:01:07 평화뉴스 pnnews@pn.or.kr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면서 내내 떠올린 말은 ‘고군분투’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해괴해 보이기만 하는 행동을 하며 그녀는 혼자 싸우고 있었다. 비비탄 총과 알록달록한 장난감 플라스틱 칼을 들고. 그녀가  물리치는 것은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끈적끈적하고 말랑말랑한 젤리피시들이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고군분투를 보며 나는 한참동안 마음이 먹먹했다.

안은영, 그녀를 만난 것은 지난 해였다. 소설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정세랑 작가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전작 소설들을 찾아 읽던 중이었다. 그 즈음 <보건교사 안은영>을 아무런 정보도 없이 드라마로 먼저 보게 되었다. 6편의 연작 드라마를 보면서 처음엔 이건 뭔가 싶게 황당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몇몇 장면이 마음을 저며 왔다. 그리고 보는 내내 안은영이 혼잣말처럼 흘리는 말들이, 그녀가 진저리치며 던지는 욕설과 짜증이, 그럼에도 결국 눈감지도 고개돌리지도 못한 채 사람들 사이에 박혀있는 오염된 것들을 찾아다니느라 쩔쩔매는 순간 순간들 위로, 살아오면서 내가 알아온 사람들과, 그들의 삶과, 그들의 지난한 싸움이 오버랩되어 자꾸 눈물이 났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오직 안은영에게만 보이는 기괴한 세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과 외로운 사명, 그것이 나는 슬펐나 보다.

   
▲ 『보건교사 안은영』(정세랑 지음 | 민음사 펴냄 | 2020)

드라마를 본 후 원작 소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순간순간 마음을 멍하게 만드는 장면에는 잠시 고개를 들고 마음을 추스렸다. 오염된 세계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것에 맞서 싸우는 친절한 사람들이 불쑥 불쑥 명치를 치고 올라왔다.

“은영은 핸드백 속의 비비탄 총과 깔때기 칼을 생각했다. 정현이 아파했더라면, 혹 정현이 한 사람에게라도 해를 끼쳤다면 예전에 정현을 분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현은 너무나 무해했다. 격하게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죽음도 있는가 하면 정현처럼 비누장미같이 오래 거기 있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오래 거기 있는 죽음, 거기에 가만히 남아있는 죽음,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해 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그 아이들의 죽음은 여전히 비누장미처럼 거기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깊은 슬픔 속에서 어느 새 친절한 사람이 되어 오염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중이다. 부모님들에게는 지금 몇 발의 비비탄 총알과 몇 분을 지탱할 기운이 남아있을까.

“-크레인 사고였어. 넘어오는데 그대로 깔려 버렸어. 멍청한 말이지만 나는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언제나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피하기는 무슨.
-비싸서 그래. 사람보다 크레인이. 그래서 낡은 크레인을 계속 쓰는 거야. 검사를 하긴 하는데 무조건 통과더라.
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


학창시절 안은영처럼 외톨이었던 강선이,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던 강선이, 은영의 손에 장난감 총과 칼을 쥐어준 강선이, 돈이 없어 만화 전문고등학교도 못 가고 실업계로 간 강선이. 그 친구가 어느 날 불쑥 그림자도 없이 희미해진 모습으로 안은영을 찾아왔다. 크레인에 깔려 이지러진 강선의 죽음 위로, 오염된 세상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들이 켜켜이 쌓인다. 그 죽음 역시 거기 가만히 남은 채로 친절한 사람들을 낳고 또 낳으며 오염된 세계에 맞서고 있다.  

“장난감 칼과 총에 은영 본인의 기운을 입히면 젤리 덩어리와 싸울 수 있었다. 비비탄총은 하루에 스물두 발, 플라스틱 칼은 15분 정도 사용 가능하다. 이집트산 앙크 십자가와 터키의 이블 아이, 바티칸의 묵주와 부석사의 염주, 교토 신사의 건강 부적을 더하면 스물여덟 발, 19분까지 늘일 수 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최대치, 스물여덟 발, 19분, 그것이 끝나면 안은영은 기진맥진한 채로 쓰러진다. 혼자서... 하염없이... 매일 매일... 안은영은 그만하고 싶지만 그만두지 못한다.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명같은 거창한 말을 받아들였다기보다 수월한 인생을 일찌감치 포기한 안은영의 고단한 삶이 짠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런 안은영에게 나타난 인표의 손, 비비탄 총을 50발 즈음 쏠 수 있게 충전시켜주는 인표의 보호막이 나타났다. 인표는 안은영이 원할 때는 스스럼없이 손을 꼭 잡아 준다. 그리고 인표는 혼자서 진땀을 흘리며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혼신을 다해 조준하는 안은영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지음 | 민음사 펴냄 | 2020) 개정판 서문

“어차피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 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나도 이 말을 오염된 세상에 맞서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친절한 사람들에게 속삭여주고 싶다. 그리고 오랜 시간 오염된 세상에 저항하는 친절한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친절한 사람의 언저리에 서있었던 나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져도 괜찮다고, 도망쳐도 괜찮다고,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어떤 날, 어떤 순간이든 오염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친절한 사람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한 겹 보호막 정도는 되어 주고 싶다.

   







[책 속의 길] 176
신동희 / 꿈꾸는마을도서관 도토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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