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바다, 아득히 사라져 버린 서래를 찾아 헤매는 해준.
밀려드는 파도, 파도, 어둑해지는 하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노래에 잠겨서 객석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 여운이 오래 오래 남아서 한동안 안개에 잠긴 것처럼 희뿌연 마음이었다.
내내 서래가 의심스러웠다. 사랑인지, 의뭉스런 마음인지, 그녀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호미산 정상에서 나는 서래가 해준을 벼랑 아래로 밀어버릴 거라고 의심했다. 오히려 서래는 깊은 바다에 자신을 빠뜨렸다. 그녀의 마지막 결심이 납득되지 않은 채 첫 번째 헤어질 결심이 끝이 났다.
"난 해준씨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어놓고 잠도 못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두 번째 영화를 볼 때, 서래의 사랑이 그제야 보였다. 해준과 헤어질 결심 대신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기로 한 마음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안개처럼 의심스럽던 마음이 걷히고 안개처럼 자욱한 슬픔이 밀려왔다. 깊은 바다에 자신을 빠뜨린 서래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구덩이를 파고 밀려오는 썰물에 스스로를 묻는 장면에 마.침.내 눈물이 났다.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예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붕괴, 무너지고 깨어짐.
품위있는 현대인, 자부심 있는 경찰이기를 포기한 해준.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해준의 목소리에 담긴 절망, 그 목소리가 왜 서래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해준의 고백이었는지 영화를 세 번 보았을 때 즈음에야 느껴졌다. 자부심을 버리고 완전히 무너지고 깨어지는 선택이 어떤 마음인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살인과 폭력을 수사하며 자부심있는 형사로 살아가는 대신 잠도 못자고 면도도 하지 않고 초췌한 얼굴로 시들어가는 해준은 그렇게 무너지고 깨어질 결심을 한 것이다. 서래에게 등을 돌리며 남긴 마지막 말,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찾게 해요'는 서래에게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주문으로 남았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참 불쌍한 여자네."
헤어질 결심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은 비가 내렸다.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살해되고, 해준이 서래를 심문할 때, 해준은 말한다.
"두 남편이 같은 형사의 관할 지역에서 자살하거나 살해되었다면 난 이럴 거 같애요. 거 참 공교롭네. 서래씨는 뭐라고 할 거 같애요."
"참... 불쌍한 여자네."
그 말을 하는 서래를 표정이 클로즈업 될 때 울컥했다. 사람과 상황에 대해 평가하고 해석하는 언어는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 장면에서 깨달았다. 마음과 처지에 공감하기보다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는 것도. 이주여성으로 살면서 바람직한 남자들은 자기와는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그런' 남자들과 결혼해서 겨우 살아가는 서래에게, 서래가 들려주는 그 말 '참 불쌍한 여자네'는 스스로에게 주고 싶던 위로이지 않았을까.
익숙해진 고정관념, 당연한 질서, 마땅한 평가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때론 무너지고 깨어질 결심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장면들이 불쑥 다가오기도 하면서 다섯 번째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흥에 빠져서 지난 여름부터 헤어질 결심에 홀릭되었다. 아직도 감흥이 저물지 않아 이 가을에 문득 문득 찾아보게 될 영화가 되지 않을까하는 예감이 든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처럼 감흥이 폭풍처럼 휩쓸려오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번지듯 서서히 잔영이 오래 머무는 영화도 있지 않을까. 나에게 헤어질 결심이 그렇다.
[그날, 나의 영화] ①
신동희 / 꿈꾸는마을도서관 도토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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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희 / 『헤어질 결심』(박찬욱 감독 | 박해일 탕웨이 주연 |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