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우리는 슬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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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태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8)



 슬픔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말한다. 슬픔은 결여에서 나온다고. 있어야 할 존재의 결여나, 채워져야 할 감정의 결여 같은 것들. 주체적 대상이 되거나 수동적 대상이 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것들. 그 결여의 틈으로 슬픔은 새어나오곤 한다.

 우리는 슬프다. 태어난 이상, 슬플 수밖에 없다. 살아가며 우리는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아파야만 한다. ‘나’도 아프고 ‘당신’도 아프다. 우리는 저마다의 상실을 겪고 있다.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당신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알 수 없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역시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 우리의 최선은 서로를 짐작하는 것뿐이다.

 단순한 위로의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조언이랍시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더 싫다. 가벼이 날아와 텅 빈 소음만 낼 뿐이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 없이 ‘도덕적 자기만족’에 취해있을 뿐이다. 어설픈 말이 아니라 서로의 슬픔에 가까워질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경험을 통한 공감을 할 수 없다면 짐작하고 상상하며 감정에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묵묵히 듣고 있어야 하고 그것마저 어렵다면,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곁에 있을 수 없다.  

 한 철학자가 말했다. 공감과 양심, 그리고 배려는 지능과 관련 있다고. 이걸 정서지능이라고 하는데 정서지능이란 자신의 감정(또는 기분)들과 다른 사람들의 감정들을 점검하고 구별해서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이끄는 능력을 뜻한다. 즉, 상대방을 공감할 수 있고, 양심의 목소리를 듣거나 누군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지능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심하게 들릴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겪었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다. 여기서 자기밖에 모른다는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걸 사실과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으로만 판단하던 사람들을 뜻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8)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2018)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 202P)

 우리는 상대방의 슬픔을 공부해야한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제일 확실하고 쉬운 건 비슷한 경험을 하는 거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또한 비극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끝없이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만 한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멈추고 상대방의 슬픔을 지겹다고 느낄 때, 우리는 상대를 적대하고 혐오하게 된다. 이 또한 비극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까. 결국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문학이 있고 음악이 있고 영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극에도, 역사 속에도, 정치에도 슬픔은 존재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음악과 영화를 이야기하고, 5·18과 태극기 부대, 천안함과 세월호를 이야기하며 슬픔을 말한다. 어찌 보면 상반되는 슬픔일 수 있겠으나 본질을 알면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도 있다. 미움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영역으로 말이다.       

 영화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28P)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이 말이 저릿하게 남는다. 삶이 힘들수록, 타인을 보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긴 시간을 들여 복잡한 걸 보는 것보다 단순하고 명쾌한 걸 찾게 되는 것도 오늘날의 현실이다. 세상이 갈수록 혐오가 가득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온전히 누군가를 바라보고 이해하기엔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으며 무엇보다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슬픔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나’와 ‘당신’을 그리고 ‘우리’를 안타까워해야만 한다. 문학에서, 영화에서, 사회 곳곳에서, 우리는 슬픔들을 만나고 이해해야만 한다. 인식함으로써, 서로에게 폭력이 되지 말고 위안이 되도록 하자. 그 길이 험난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에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을 나대로 시도해보았으나 결과는 이렇게 변변찮다. 수없이 다시 물어야 하리라. (177P)     

 
 
 






[책 속의 길] 183
조영태 / 대구참여연대 상근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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