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하는 15년전 아버지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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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칼럼] "진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빠져 있지 않기를"


 15년 전 1997년 가을....한총련 관련 건으로 대구교도소에서 미결 징역을 살고 있을 때였다 추석 즈음 교도소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왔다. ‘한총련 김준배 투쟁국장이 보안수사대에 쫓기다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학생운동을 하면서 얼굴을 알고 지냈던 김준배 형의 죽음은 당시 교도소에 있었던 학생양심수들을 분노와 슬픔에 잠기게 했다. 안에 있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서로 연락을 취해 일주일간 단식을 하기로 했다. 때마침 아들이 무척 보고 싶었던 아버지는 중고 프레스토를 끌고 교도소까지 왔지만 단식 때문에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아들이 갇혀 있는데 굶기까지 하니 얼마나 가슴이 무너져 내렸겠는가? 아들 얼굴도 못보고 울산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에서 아버지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어 사고를 낼 뻔 하셨고 겨우 갓길에 차를 세워 한참을 진정하고 겨우 내려오셨다고 뒤에 들었다. 그리고 교도소로 한통의 편지가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아버지의 편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로 무뚝뚝하며 자식들과의 대화도 거의 없었던 아버지가 편지를 쓰신 것이다. 중학교를 중퇴하셔서 글이란 것도 써 본 적이 없으시고 간혹 받침이 틀린 것도 있었다. 아버지께 편지를 받은 것은 내겐 감동이었고 찬찬히 읽어가다 이 문장에서 나는 그만 무너졌다. “....이 자연은 비바람 눈보라 태풍까지도 다 감싸안는데 아버지가 되어 아들의 마음 하나를 이해하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나는 이 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미안해도 죄송해도 천번 만번 내가 그런 마음이어야 하는데....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이 온전히 전해오고 아버지가 겪었을 아픔과 고뇌를 되새겼다.

 친척들은 면회를 오지 않았고 검사로부터 징역7년을 구형받은 아들의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온 인생의 어떤 순간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온 이념과 생각의 반대편에 있는 소위 ‘운동권’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을 더 아파했다. 아버지의 편지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딸이 있는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딸이 내가 생각하는 이념과 가치와 정반대의 생각과 행동을 할 때 나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다.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얘기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15년 전 그 시절에 나와 함께 교도소의 안과 밖에 있었던 전국의 학생 노동 운동가들 대부분이 구 민주노동당 현재 통합진보당의 당원이고 주요 당직을 맡고 있다. 비정당인이지만 현실정치에서 통합진보당이 진보를 향한 한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뎌주기를 바랐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통합진보당의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자식으로 아버지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고 나는 ‘동지’들과 함께 했고 그들과 ‘평생’을 결의했고 우리는 누구보다 옳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동지’들은 자의반 타의반 떠나게 되었고 ‘평생’의 결의는 아이들 기저귀 값에 무너졌으며 우리의 이념은 때때로 많이 틀렸었다. 내가 나의 ‘동지’들과 부침을 겪을 때에도 아버지는 열심히 노동했으며 2002년 스스로의 선택으로 대통령으로 권영길을 선택했고 일상의 성찰로 주어진 삶에 성실하시다.

통합진보당의 창당 훨씬 이전부터 ‘동지’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을 함께 해온 사람들이라면 어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단정’하고 ‘발표’하며 ‘정파결속’을 다지며 ‘전의’를 다지고 ‘사상투쟁’을 하기 전에 먼저 더 깊이 이해하려 노력해야 했다. 물론 깊게 이해하는 것은 덮어놓고 다 이해하자는 것도 아니며 발생한 문제를 덮고 없는 일로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건이 있었고 그 과정에 있는 ‘사람’과 ‘진영’들이 있고 이를 지켜보는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 ‘진영’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긴장감과 위기감을 느껴 상대 ‘진영’에 대해 공격의 화살을 쏘기 전에 ‘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동지’에 대한 이해로 ‘과정’에 대해 충분히 살피려는 노력이 충분히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는 달라졌으리라.

 수배 받던 내가 경찰에 잡히고 처음으로 면회 온 아버지가 내게 한 첫마디는 “ 너 이자식 왜 그랬어. 그러게 내가 절대로 데모 하지 말랬잖아.”가 아니었다. ‘괜찮나...몸은 건강하고...그래 밥 잘 챙겨 먹으라. 아버지는 니 믿는다’였다. 통합진보당이 현재의 상태까지 오지 않을 몇 번의 고비에서 늘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깊은 이해’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이런 탈당행렬은 없지 않았을까? 진보의 ‘희망’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이 ‘걱정꺼리’로 전락하지 않지 않았을까?

 진보의 원칙과 희망과 대안에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빠져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택진 칼럼] 7
오택진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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