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19.12.13 금 11:50
> 뉴스 > 나눔과 섬김 | 길 위에 서민
   
평화시장 사랑방, 손수레 끌고 냉차 파는 할머니
15년째 시장 길목에서..."다들 고생하매 살았지, 이게 사람 사는 맛인기라"
2013년 04월 05일 (금) 11:42:26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pnnews@pn.or.kr
   
▲ 냉차를 만들고 있는 정모 할머니(2013.4.4.대구 동구 평화시장)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마른 손이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의 차(茶) 가루를 컵에 넣었다. 유리병에서 커피와 설탕도 한 숟가락씩 퍼 다른 빈 컵에 담았다. 차가운 물을 들이붓고 얼음도 3-4개씩 떨어뜨렸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숟가락으로 살살 저었더니 냉차가 완성됐다. 컵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앞치마를 두른 시장 상인들이 골목 여기저기서 나와 자신이 주문한 냉차를 찾아갔다. 식육점 아줌마는 칡차, 떡볶이 가게 이모는 냉커피, 화장품 가게 사장님은 쌍화차, 노점상 할머니들은 마차. 상인들은 수레를 둘러싸고 차를 마시며 날씨, 가족, 드라마 이야기로 주제를 바꿔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4일 낮 대구 동구 평화시장. 15년째 이곳 길목에서 냉차를 팔고 있는 정모(69.신암4동) 할머니 수레는 오늘도 시장 사랑방이 됐다. 점심을 먹고 난 상인들은 할머니 수레를 찾아 차를 시켜놓고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기 바쁘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와중에도 할머니는 주문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빠른 손으로 냉차를 탔다. 시장 한가운데 수레 주변으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신없고 시끄럽제? 이게 다 사람 사는 맛인기라. 못해도 다 10년 넘게 같이 일하매 정든 사람들이다. 힘들 때 즐거울 때 옆에서 서로 돕고 살았다. 이제 우아래로 10살 많고 적어도 다 반말하고 언니, 동생 한다. 차 마시매 수레 옆에 서서 떠들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지. 사랑방이다 사랑방" 

   
▲ 점심식사 후 정 할머니 수레 주변으로 상인들이 하나 둘 모여 들고 있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할머니는 매일 오전 10시 평화시장으로 출근한다. 오전 8시쯤 집에서 그날 팔 식재료를 미리 수레에 챙겨놓고 빠진 것이 없나 꼼꼼히 확인한다. 유리병에는 설탕, 커피, 생강차 가루를 담고 마차와 율무차, 쌍화차, 칡차, 대추차, 석류차는 낱개 포장된 작은 종이 박스를 들고 나온다. 냉장고에 미리 얼려놓은 얼음은 작은 아이스박스에 넣고 찬물과 따뜻한 물은 각각 보온병에 담는다.

모든 식재료는 수레 가운데 짐칸에 넣고 큰 자물쇠로 잠근다. 수레 위에는 비닐봉지, 빨대, 행주, 컵, 숟가락, 장갑, 우산, 쟁반만 올려놓는다. 돌부리에 걸려 수레 채 넘어진 적이 있어 걸음은 조심스럽다. 수레 위에서 흔들거리는 도구들은 모두 빨래집게로 고정돼 있다.

시장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는 그날 장사할 지점을 고른다. 어차피 장사하는 곳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장소는 매일 변한다. 시장 통로 한가운데 길에서, 버스정류장 근처에서, 다른 노점상처럼 인도에서 하기도 하고, 손수레를 끌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할 때도 있다.

이날 할머니는 상점과 노점상이 나란히 늘어선 시장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식재료를 손수레 위에 꺼낸 뒤 보기 좋게 진열하고 본격적으로 장사를 했다. 오전 11시쯤 시장에서 장을 보던 손님 둘이 냉커피와 냉차를 주문했다. 커피는 5백원, 냉차는 1천원. 첫 손님에게 받은 돈은 비닐봉지에 넣었다.

   
▲ 수레 가운데 짐칸에서 얼음을 꺼내는 정 할머니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여름에는 시원한 냉차, 길 가다 마시면 좋잖아. 예전에는 결혼식장 같이 사람들 많은 데서도 판 펴놓고 팔았지. 그때는 마트나 커피집이 이래 안많았잖아. 그런데 요즘에는 어딜 가도 마트고 커피 파는 집이잖아. 집집마다 커피기계도 있고 정수기도 있고. 당연히 예전보다 어렵지"


첫 손님이 다녀간 후 30분이 지났다. 아무리 서서 기다려도 손님이 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고추 파는 노점상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노점상 파라솔 안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할머니 무릎 관절이 아픈지 '아이고 아이고' 하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할머니는 다리를 주무르며 수레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래도 안되겠다 생각했는지 식사를 하고 계속 장사를 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미리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수레에서 꺼내와 노점상 할머니와 함께 길에서 식사를 했다. 시장 곳곳에는 중국집 배달원 오토바이와 쟁반을 짊어진 아주머니들로 북적였다.

정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 시장, 밭, 식당, 공공기관 등 다양한 곳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월급 대부분은 부모님에게 생활비로 보내 정작 할머니 손에는 얼마 남지 않았다. 28살이 되던 해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낳았다. 가정을 돌보느라 모든 일을 관뒀지만 일용직 남편 벌이로는 모든 생계를 감당할 수 없어 할머니는 다시 일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그렇게 살았지. 뭐 특별한 얘기라고...시장서 장사하는 아지매들 사연 비슷해 다 고생하매 살았지. 요즘에는 여자도 배우고 좋은 직장 다니지만 예전에는 가족 뒷바라지만 했어"


   
▲ 다양한 차 가루로 빼곡히 들어찬 손수레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50대 중반까지 식당에서 배달일도하고 공장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도 하며 자녀들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더 이상 할머니가 일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냉차 장사는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장뿐만이 아니라 결혼식장이나 유원지 같은 곳에서도 장사를 했다.

지금은 건강이 나빠져 예전처럼 수레를 끌고 다니며 장사를 할 수 없게 됐다. 매출도 예전보다 줄어 하루 6-7천원 벌기도 힘들어졌다. 한 달에 30만원 남짓 버는 게 다다. 자식들이 조금씩 돈을 보태주지만 생계는 여전히 빠듯하다. 손자까지 생겼는데 계속 자녀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나이 먹고 어디 일할 데가 있나. 그렇다고 모아둔 재산이 있나.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 먹고 놀면 어야노. 남편도 집에서 놀 때가 많고 아들도 먹고 살기 바쁜데. 지들도 새끼 키우려면 억수로 힘들끼라. 수레바퀴 고장 날 때까지 차 팔아야 안되겠나. 서서하는 일 고단해도 웃으매 열심히 살아야지"

[평화뉴스 - 길 위에 서민 17 (전체 보기)]
이 글이 좋으시면 손가락 모양의 추천 버튼을 눌러주세요.
포털 daum view(블로그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관련기사
· 지하실서 쪽잠, 아파트 경비원의 쉴 새 없는 24시· 대학에서 40년째 '김밥' 파는 할머니
· 구두 수선 50년, 뒤축만 봐도 그 인생이...· 눈 비 맞으며 10년, 거리의 '야쿠르트 아줌마'
· 휠체어 탄 '뻥튀기' 아저씨의 다르지 않은 삶· 연탄배달 40년..."누군가에게 따뜻한, 얼마나 뿌듯해"
· '퀵배달' 아저씨의 아슬아슬한 하루· 45년 계란 장수, 일흔 할아버지의 종소리
· 어머니와 아들,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겨울비 아랑곳 않고 녹슨 고철 리어카에...
· 어깨에 짊어진 무게, 악착같은 청춘의 삶...· "자식들 힘들게 돈 버는데 어매가..."
· "가족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다 오케이!"· 한겨울, 전단지 돌리는 동성로 할머니들
· 한파에 폭설에...멈출 수 없는 중국집 배달원· 한겨울 한파...거리에서 만난 삶의 현장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본 신문에 게재된 기사, 링크에 대한 모든 법적권리와 책임은 기사작성자 평화뉴스 에게 있습니다.
* 평화뉴스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신문윤리강령과 신문윤리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 제호 : 평화뉴스 * 편집.발행인 : 유지웅 * 창간.발행일 : 2004년 2월 28일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대구 아00010 * 정기간행물 등록 연월일 : 2007년 3월 14일
(우)41266 대구시 동구 국채보상로 155길 54 (상가동 202호) | 대표전화 053-421-6151 | 팩스 0505-421-61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유지웅
Copyright 2008 평화뉴스. All rights reserved. 전자메일 pnnews@p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