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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었던 여름, 농사꾼에게 마음껏 책 읽기란...
최은정 /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
(존 윈치 글·그림 | 조은수 옮김 | 주니어파랑새 펴냄 | 2000)
2018년 12월 18일 (화) 13:00:33 평화뉴스 pnnews@pn.or.kr

할머니는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할머니도 한때는 도시에 살았었지만 도시가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복잡해지자 ‘시골 가는 기차’를 탑니다. 하지만 이사한 시골집에는 할 일이 무척 많았어요. 집 안에도, 집 밖에도. 게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자꾸 닥쳐요.
 
   
 
“봄이 되자 생각지도 못했던 손님이 찾아왔어요. 참 돌봐줄 일이 많은 손님이었지요.” 할머니는 한 손에는 젖병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새끼 양을 돌봤어요. 새끼 양이 좀 자라서는 털까지 깎아 주어야 했어요. 새끼 양 손님은 여름까지 머물렀고, “할머니는 ‘아! 이제야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곧 과일 따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과일을 따고 나니 다가올 철에 대비해서 과일잼을 만들어 두어야 했어요. 할머니는 이제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날씨까지 도와주지를 않아요. “그해 여름은 몹시 더웠고 아주 많이 가물었어요.” 할머니와 농장 동물들이 뜨거운 여름 속에서 보냈던 시간은 말로 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몹시 더웠고 아주 많이 가물었다는 짧은 글 아래 펼쳐진 그림과 다음 장에 아무 글 없이 이어진 그림 속에서 할머니와 동물들은 많이 지쳐 있고 이글이글 불길 옆에서 두려워하고 있거든요.

   
 
힘들게 견뎌낸 여름이 겨우 지나고 “‘가을에는 책을 읽어야지!’ 하고 할머니는 생각했지요. 하지만 장마철이 너무 일찍 찾아왔어요.” 하늘도 참 야속하지요. 비는 겨울까지 내렸어요. 할머니 집에 불을 피워 둔 난롯가에는 동물들이 모여 앉아 있고, 책도 쭉 쌓여 있어요. 할머니가 펼쳐둔 책은 토끼가 보고 있고, 할머니는 마음이 급했는지 비가 내리는 날에 장작을 패고 있어요. 길고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지요.

“하지만 겨울이 깊어지자, 할머니는 동물들을 돌보는 일이며 과일잼을 저장해 두는 일, 그 모든 일들을 마칠 수 있었지요. 이제 모든 것이 평화롭고 조용해졌어요.” 혹독했던 여름날에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지친 동물들을 태우고 다녔던 낡은 욕조가 할머니 집 앞 개울에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앉아 있고, 캥거루가 할머니 집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이제서야 할머니는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래요. 할머니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왔어요.  

   
 
 
저는 이 책을 볼 때마다 행복하기도 하고 조금 서글프기도 해요. 모든 것이 평화롭고 조용할 때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무척이나 부럽지만,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시간을 가지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으니 말이에요.

누구나 하고 싶은 것과 바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 바람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모든 여건이 갖추어져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내가 바라는 대로 착착 잘되진 않잖아요. 계획에도 없던 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 귀찮고 하기 싫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같은 게 늘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뭔가 여유를 찾고 싶은데 책 한 권 집어들 시간이 없을 때 전 이 책을 펼쳐 보게 돼요.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삶에 대해 서두는 발걸음,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게 되지요. ‘그래,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때가 올 거야. 지금은 조금 정신이 없는 때잖아.’

   
 
우리 가족도 할머니처럼 ‘시골 가는 기차’를 탔어요. 6년 전쯤 귀농이란 걸 했지요. 농사짓는 부모 밑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호미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으니 그야말로 생짜 초보 농사꾼이 된 거예요. 그런 제가 시골살이를 시작하면서 바랐던 건 뭐냐 하면, 니어링 부부처럼 ‘살아가기 위한 노동에 네 시간, 책 읽고 생각하며 글 쓰는 데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네 시간.’ 이렇게 하루하루를 조화롭게 보내는 것이었어요. 전 그것이 무척이나 소박한 바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억대 농부가 되겠다는 것도, 유유자적 전원생활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잘 해 나간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바람이 정말로 이상적인 바람이었구나,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한 이야기였구나, 하는 것을 몇 달 만에 깨닫게 되었어요.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농번기, 농한기도 없이 일 년 내내 일해도 농사만으로 가족 일 년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운데, 살아가기 위한 노동을 위해 네 시간만 일한다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란 걸 알았어요. 일하고 들어오면 아픈 허리와 다리를 펴자마자 뻗어 버리니 책 한 권 손에 드는 것조차 정말 쉽지 않았어요.

올해 우리 가족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겪은 날들 가운데 가장 힘든 날들을 보냈어요. 우리에게 닥친 일을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 이야기에 끼워 맞춰 본다면, ‘새로 이사한 집에는 여전히 할 일이 많았어요. 집 안에도, 집 밖에도. 돌봐줄 일이 아주 많은 손님도 계속 머물러 있고요. 그뿐 아니었어요. 그해 여름은 몹시 더웠고, 아주 많이 가물었어요. 수확해야 할 과일들이 모두 벌레 피해를 입어서 이제껏 애썼던 게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어요.’쯤 되지 않을까요? 날씨가 너무 더워서라고 원망해도, 우리가 덜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해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고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만큼 흉작이었어요.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먹는 이와 땅에게도 이로운 농사를 짓겠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꿋꿋하게 버텨 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더 버틸 수 없을 만큼 세상이 우리를 내모는 건가 싶었어요. 우리의 혹독했던 여름은 세상과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사는 게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고단한 날들만 계속된다면 우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내게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까.

   
▲ 가을걷이가 끝나고 마늘과 양파를 심는 농촌 들밭... / 사진. 최은정

그 여름을 보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워진 날, 이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할머니가 보냈던 여름이 그저 몹시 덥고 가물기만 했던 게 아니었구나.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여름을 할머니가 보냈구나. 그걸 그림으로 그려 놓고 있었어. 그런데 왜 할머니가 보낸 여름을 묘사한 글은 이리도 짧을까? “할머니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라고 덧붙이지 않았을까?’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더 이상의 감정을 덧붙여 두지 않은 건, 그래요, 우리 삶도 그래야 견딜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느끼기엔 너무나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한두 줄로 설명되면 그만인 일인 것이고, 어차피 흘러가 버린 그 시간을 두고 울고불고 하는 건 얼마나 구질구질한 일인가 말이에요.

제가 이 책을 때마다 꺼내보게 되는 건 이 책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모두 꿈을 찾아 살아가지만 아이를 키우고 돌보느라, 일을 하고 돈을 버느라 하고 싶은 건 제대로 하지 못하고 때로는 큰 시련을 겪고 시련 후에도 또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치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이에요. 그러면서도 커다란 삶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일상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그림에 담고 있어요. 할머니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는 동안, 귀신이 나올 것 같던 시골집이 따뜻하고 안락한 집으로 바뀌었고, 바구니에 쏙 들어가던 새끼 양은 할머니 키만큼 커졌어요. 처마 아래에는 농사지은 호박도 수북이 쌓여 있고 과일잼은 보기만 해도 행복해져요. 따뜻한 난로 위에 걸려 있는 수건과 양말, 난로에 걸려 있는 주전자에서는 할머니가 살아온 냄새가 배어나겠지요? 할머니는 바쁜 봄날에 양을 돌보면서도 책을 들고 있었고, 혼자 몸도 건사하기 힘들었을 여름날에는 지친 동물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어요. 삶이란 작은 것이기도 하고 큰 것이기도 해요. 작은 일상을 살아나가는 건 대단한 일이고, 위대한 인생도 작은 일상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군더더기 하나 없는 글, 간결한 글 속에 내포되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묘사해 내고 있는 풍부한 그림, 그림 속에 담겨진 또 다른 이야기, 사람과 동물 그리고 사람과 풍경의 조화로움, 원경과 근경의 과감한 변화, 거기에다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깊은 메시지까지. 그 가운데서도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마지막 쪽이에요. 이제야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할머니는, 책을 읽다가 안경을 벗어 놓고 살짝 잠이 들었어요. 만약 할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책을 보고 있는 그림이었다면 그건 정말 재미도 없고 여지도 없는 멋대가리 없는 책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삶이란, 마지막 그림 속 할머니 모습처럼 그런 걸 거예요. 무척 바라던 일을 하게 된다 해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막상 그 시간이 닥치면 그것만 부여잡게 되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요. 살짝 졸기도 하고, 옅은 만족감만으로도 충분해 하기도 하고, 살짝 지겨워지기도 하는 시간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런 시간들, 그러니까 자기가 바라는 것을 꿈꾸는 시간, 견디는 시간, 장애물을 헤쳐 나가는 시간, 처음 만나는 시간, 만끽하는 시간, 익숙해지는 시간. 이 모든 시간들이 합쳐져서 삶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내가 올해 견뎌 낸 시간들이 내 삶에서 부끄럽게 남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미웠던 2018년의 끝자락에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가 어떤 책을 읽고 있으며 어떤 책을 읽어 싶어 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그래서 이 책은 면지까지 놓치지 말고 천천히 넘겨보아야 할 책입니다.

   
 






[책 속의 길] 156
최은정 / 글 쓰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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