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이 빠지고, 손가락 마디가 검게 변했다.
◆ 경북 구미시 산동읍 삼성전자 1차 하청업체인 케이엠텍에서 지난 2년 간 '삼성 갤럭시 휴대폰'을 조립하던 21살 하청노동자 수현(가명.남성)씨다.
지난해 9월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올해 4월 조혈모세포 이식(골수 이식)을 받은 뒤 몸에선 이 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수현씨의 가족들은 슬픔에 잠겼다.
아버지 A(53)씨는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꽃다운 어린 나이에 실습생을 거쳐 입사한 우리 아들"이라며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죄밖에 없는데...우리 아이가 왜 이런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받아야 하냐"며 14일 경북 구미 공단 케이엠텍 공장 앞에서 하소연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회사라는 삼성전자의 1차 협력 업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막힌 현실에 대한 억울함을 어디에 말해야 하냐"고 울분을 토했다.
삼성 휴대폰을 만들다 백혈병에 걸린 20대 하청노동자 질병 원인을 놓고 논란이다.
가족을 포함해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산업재해"라며 "원청인 삼성전자와 하청업체가 책임져야 한다"고 촉구한 반면, 삼성과 하청업체 측은 작업 환경에 문제가 없었다"며 "업무상 질병으로 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대구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민주노총경북본부' 등 27개 시민사회단체·노동계·진보정당은 14일 오전 구미시 산동읍 케이엠텍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과 하청업체는 백혈병 진단을 받은 청년 노동자에 대한 산재를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노사의 말을 종합하면, 케이엠텍은 삼성전자 1차 하청업체로 삼성 갤럭시 S21, S22, S23, Z플립 시리즈 등 휴대폰을 조립하는 기업이다.
수현씨는 지난 2021년 10월 특성화고 3학년에 재학할 때 현장실습생으로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2022년 1월부터 영진전문대의 '고숙련 일·학습병행제도(P-TECH)'를 통해 주중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 학교를 다니는 방식으로 일을 이어갔다.
업무는 납땜이 돼 넘어온 휴대전화 기판 안쪽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을 조립하는 일이었다. 하루 2천~3천개의 부품을 수작업으로 조립해 왔다.
◆ 2년 일한 지난해 9월 22일 수현씨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올해 3월까지 7개월간 7차례의 독한 항암치료를 받고, 지난 3월 28일에는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까지 받은 뒤 현재 집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다.
병마와 싸우는 이 상황 속에서도 사측은 병에 걸린 지난해 9월부터 올해 1월 31일까지 치료비 지원 없이 무급휴직 처리했고, 지난 2월 1일 자로 해고됐다.
하지만 해고 사실은 사측의 통지가 아닌 '건강보험납부통지서'상 직장가입자 자격이 상실된 것을 보고 알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대학도 일·학습 병행 제도상 출석 일수가 모자라 자퇴를 권했고, 수현씨는 학업도 중단해야 했다.
◆ 가장 큰 쟁점은 백혈병의 발병 원인이다. 반올림은 "업무상 질병"이라고 보고 있다.
앞 공정에서 사용한 접착제 성분이 고온 압착 과정에서 휘발돼 백혈병을 유발하는 밴젠, 포름알데히드 등 발암물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난 4월 17일 근로복지공단 구미지사에 산업재해보상보험 요양급여를 신청했고, 1주일여 뒤인 4월 25일에는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접수했다.
이들 단체는 "자라면서 잔병치레 하나 없이 건강했던 노동자가 이곳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백혈병에 걸려 투병 중"이라며 "스물한 살 청년의 소중한 목숨과 삶의 희망마저 위협하는 무서운 병마를 안겨 준 사측에 제대로 책임을 묻기 위해 모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측은 처음부터 백혈병 투병 사실을 알았지만, 지난 7개월간의 항암치료와 힘든 골수 이식 수술을 견디고 회복하는 순간에도 단 한 차례도 위로나 치료비 지원을 한 적 없다"면서 "오로지 무급휴직 4개월 만에 아무 통보도 없이 강제로 해고한 것이 전부"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대표이사 공식 사과 ▲부당해고 철회, 원직 복직 ▲백혈병 발병시점부터 산업재해 보상이 이뤄질 때까지 치료비 전액 부담 ▲진상규명을 위한 피해자 추천 전문가의 현장조사와 자료 제공 ▲재발방지대책 마련 ▲강제자퇴 조치 철회 ▲삼성전자(원청) 책임 인지와 사태 해결 협조 등을 촉구했다.
이종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노무사는 "바로 앞 공정에서 남땜이 돼 온 기판 위에 플라스틱 부품을 조립하는 업무를 맡으며 접착제를 고온 압착하는 과정에서 벤젠, 포름알데히드 등 발암물질 발생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산업재해로 의심하기 충분한 직업병"이라고 주장했다.
◆ 하청업체는 논란이 커지자 수현씨에 대한 해고 조치를 일단 철회했다. 앞으로 치료비 지원 등도 약속했다. 오는 24일에는 수현씨 가족을 만날 계획이다.
케이엠텍 관계자는 "인사 담당자가 문서 통보를 하지 않은 채로 해고 조치를 내려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난 2월 1일부터 복직을 시켰다"면서 "치료비 지원도 충분히 다 해주겠다고 가족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 원청인 삼성전자는 "작업환경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측 관계자는 <평화뉴스>와의 통화에서 "협력사 직원의 문제긴 하지만, 당사자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상황"이라며 "협력사와 협의해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케이엠텍 작업 환경을 매년 전문기관이 측정해 노동부에 제출하는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당사자가 근무한 조립 공정은 작업 환경 측정 대상 물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법상 측정 대상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학업 논란의 영진전문대학교는 14일 보도자료를 내고 "2023년 12월 19일 출석 부족으로 졸업이 불가하고, 자퇴 후 건강을 회복해 편입이 가능함을 안내했다"면서 "수현씨가 하루빨리 병마를 이겨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일상 복귀하길 바라며, 본인이 희망하면 우리 대학에 편입학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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