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지우려는 항일의 역사...되새기는 '홍범도 장군'의 삶,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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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동순·이만열 '홍범도' 강연·북콘서트 잇따라
'홍범도 장군 역사 지우기 철회' 호소문도 발표 예정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가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 계획을 밝혀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대구에서 홍범도 장군의 삶과 항일 무장투쟁 역사를 되새기는 강연과 북콘서트가 잇따라 열린다. 특히 장군의 흉상 이전 등 '역사 지우기' 철회를 촉구하는 호소문도 발표할 예정이다.

광복회 대구지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오는 9월 13일 저녁에는 교남YMCA에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의 '홍범도 장군 항일 무장 투쟁의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이동순(73) 영남대 명예교수의 특강을 연다. 특강에 앞서 '홍범도 장군 역사 지우기 철회'를 위해 대구경북 시도민에게 드리는 호소문도 발표할 예정이다.  이 자리는 광복회 대구지부, 대구경북전문직단체협의회, 전교조 대구경북지부를 포함한 17개 단체가 공동주최하고 대구사회연구소가 주관한다.
 
 
 
이어 18일에는 '혁신공간 바람'(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상상홀에서 이동순 교수가 펴낸 『민족의 장군 홍범도』(한길사, 2023) 북콘서트가,  20일에는 '그들은 왜 홍범도 장군을 부정하는가' 주제로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역사특강이 열린다. 북콘서트는 오마이뉴스와 뉴스민이, 이만열 전 위원장의 역사특강은 더불어민주당 대구 수성구을·중남구지역위원회가 주최한다.
 
 
 
 
 
강연과 북콘서트에 나서는 이동순 교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대구형무소에서 고문받다가 옥사한 경북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명균(1863~1923) 선생의 손자로, 지난 40여년간 홍범도 장군을 연구했다. 특히 올해 3.1절에는 독립을 위해 항일 투쟁에 평생을 바친 대한독립군 총사령 홍범도 장군의 자료을 집대성해 『민족의 장군 홍범도』을 펴냈고, 지난 8월 26일에는 국방부의 흉상 철거를 비판하는 자작시 '홍범도 장군의 절규'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페이스북이 '혐오발언 콘텐츠'라는 이유로 9월 1일 이 교수의 게시물을 삭제하면서 대구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 재배포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 4일 평화뉴스와 통화에서 "독립운동사의 크나큰 독립영웅 홍 장군을 이 정권이 마구 할퀴고 오도하고 유린해 참혹한 마음으로 시를 썼다"고 밝혔다. 특히 국방부가 육사 흉상 이전과 관련해 '자유시 참변 연관, 소련 공산당 가입' 등을 그 이유로 내세운데 대해 "거짓말과 몰상식으로 적은 입장문"이라며 "역사를 정확히 알지도못하면서 자유시참변의 주모자로 홍 장군을 몰아붙이는 것은 몰역사적 관점, 독립운동사 지우기"라고 비판했다.

다음은 이 교수의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일제가 2만여명의 사단급 병력을 풀어 중국 만주에 살던 조선인 마을을 불 지르고 죽인 간도학살(1920.10~1921.4) 사건으로, 홍 장군 등 3,000여명은 이후 러시아로 피신했다. 머물게 된 곳이 자유시(러시아 스보보드니)인데, 당시 소련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총기 반납을 명령했다. 홍 장군은 소련 땅에 왔으니 나중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도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쪽이었고, 반대파는 군인이 총을 놓으면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 소련은 독립운동가 170여명을 죽이고 600여명을 포로로 잡아들였다. 이것이 자유시참변의 전체 내용이다. 국방부 설명과 달리 당시 홍 장군은 자유시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고, 뒤늦게 이 소식을 알고 돌아와 시신을 수습한 뒤 솔밭에서 '소같이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통곡했다.
특히, 생포된 600여명 재판이 열리자 홍 장군은 모두 석방해달라고 자청해 570여명이 석방됐다. 이후 레닌이 모스크바에서 홍 장군을 만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홍 장군이 30여명 부하를 풀어달라고 요구해 추후 모두 석방됐다. 그러나 레닌 이후 스탈린의 소련은 1937년 독립군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켰고, 홍 장군도 강제 이주돼 쓸쓸한 말년을 보내며 삶을 마감했다"
 
1921년 소련 크램린궁 앞에 선 홍범도 장군과 홍범도 일지 / 사진 출처.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1921년 소련 크램린궁 앞에 선 홍범도 장군과 홍범도 일지 / 사진 출처.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전설의 영웅, 홍범도 그는 어떤 사람인가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전설의 영웅 홍범도' 전문.

항일무장 독립투쟁으로 일관되었던 여천 홍범도장군의 삶은 긴장과 걱정, 궁핍과 위험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조실부모한 가난한 평민이었다. 의지 할 곳 없는 그에게 세상은 천대와 괄시, 학대와 무시만을 안겨주었다.

봉건의 한 시대가 저물고 근대라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전환의 공간 조선. 혼란의 틈을 타 누군가는 부정과 손을 잡고 자신만의 안락함을 이어가려 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잡으려했다.시대는 영웅을 만든다고 했지만 본성이 정의롭지 않았다면 영웅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부패한 군인, 지주, 자본가들에 맞서 싸웠고, 제국주의의 야욕을 꺾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 그가 바로 전설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다.

가난한 머슴의 아들, 고아, 식객승, 사냥꾼, 노동자, 포수의 척박한 삶

홍범도는 머슴 출신의 독립운동가였다. 홍범도 장군은 자신도 머슴이었지만, 아버지도 머슴이었다. 국가로부터 혜택은 커녕 태생과 성장과정에서 온갖 핍박을 받아왔다. 친일로 특권을 누려 온 자들이 거침없이 조국을 배신할 때, 그는 누구의 지시나 부름도 없이 스스로 의병이 되었다.

신식군대에서의 나팔수 활동, 제공장의 노동자, 금강산 신계사에서의 식객승 등 척박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고국의 독립 을 위해 투쟁하고 희생한 홍범도 장군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신장이 190cm에 이를 만큼 장대했던 그를 사람들은 ‘구척장신의 장군’이라 불렀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 숱이 많은 눈썹과 수염을 가진 그는 항상 군복을 입었고, 총과 작은 수첩을 지니고 다녔다. 총은 군인의 상징이었고, 자신 의 삶을 무장투쟁에 바치겠다는 약속의 징표였다. 수첩은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생사를 달리했던 전우들의 이름이나 전투 현황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전우들을 잊지 않겠다는 그의 마음이었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말겠다는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가난했지만 정의로웠고, 일상의 저항은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편히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자유와 평등이 싹 튼 조선에서 주체적이지 못한 삶은 과거의 잔재가 되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부패하고 단죄되지 않는잘못은 반복됨을 그는 알고 있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제는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분연히 일어나 의병 투쟁을 시작했다. 세 번의 전투는 모두 패했고, 정의감만으로 적을 무찌를 수 없음을 실감한 그는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데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타인에겐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자신에게는 더없이 냉철했다.

그에게 사격술은 삶을 유지시켜주는 든든한 무기였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화승총 한 자루가 밑천이었다. 수많은 일본군을 쓰러뜨리고 총을 빼앗아 의병들에게 나눠주었다.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독립군들에게 탄약없는 총은 때로는 짐이기도 했지만 그는 총을 소중히 했고, 사격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늘을 날으는 장군이라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일본군을 격파

독립전쟁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며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위상을 확인시킨 홍범도 장군. 독립 쟁취를 향해 굽히지 않는 국민적 자존과 결기를 보여준 홍범도 장군. 하지만 전투라는 것이 매번 승리를 안겨주는 것은아니었다. 승리했다 하더라도 함께 싸웠던 동지들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며 가슴에 묻어야했던 일도 많았다. 그는 군림하지 않는 장군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부하들에게 먼저 먹였고, 군자금이 필요할 때는 솔선수범하여 노동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래서 부하들은 언제나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나보다.

1907년 홍범도 장군은 의병부대를 조직,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일본군의 목을 조여갔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들은 그의 아내를 볼모로 잡아갔다. 홍범도 장군을 회유해 오라고 온갖 고문으로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비열한 일본군들을 단호하게 꾸짖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그녀는 홍범도 장군의 아내다웠다. 작은 아들 용환도 아버지를 닮긴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형이 죽은 후 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향한 용환은 간도참변 때 일본군에 의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건 아내와 두 아들 모두를 앞세워 하늘나라로 보낸 그는 외로운 영웅이었다.

‘날으는 홍범도 장군’이 하루빨리 대한민국으로 돌아오길 소망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경을 넘었고, 평생을 항일 무장 투쟁으로 살아온 홍범도 장군. 중국이나 연해주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언제가는 태어나 자란 내 나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조국은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야속한 시간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전설의 영웅 홍범도. 2년 뒤 조국은 주권을 되찾았고,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이역만리 먼 곳에서 동쪽 끝 어딘가에 있는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 출처.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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